높은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는 동시에 기준금리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지만 민간소비가 예상 밖으로 강한 회복세를 보인다는 한국은행의 진단이 나왔다. 통상적으로 물가가 오르면 실질소득이 감소하기 때문에 소비를 줄이게 된다. 기준금리 인상 역시 소비·투자를 위축시키는 등 총수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소득 여건이 크게 개선되면서 소비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와 같은 소비 회복은 성장률 측면에서 도움이 되지만 수요 측 물가 상승 압력을 끌어올려 물가를 잡기 더욱 어렵게 만든다. 소득이 풍부한 계층은 고물가·고금리 충격에서 한발 비켜나 소비를 늘리며 물가를 자극하는데 이로 인해 취약계층은 이중고를 겪는 상황이다.
25일 한은은 올해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2.6%로 제시해 기존 전망치(2.7%)보다 0.1%포인트 낮추는 데 그쳤다. 한국경제연구원이 22일 예상한 2.4% 대비 0.2%포인트 높을 뿐 아니라 국제통화기금(IMF)이 지난달 말 내놓은 2.3%보다 0.3%포인트 높은 수준이다. 경제 전망 기관 중에서 높은 편이고 한은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다. 무엇보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해 경제 성장률도 약 2.3% 선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한다”라고 적은 지 불과 20일 만에 전혀 다른 예상치를 내놓은 것이다.
한은은 최근 대내외 여건의 불확실성이 고조되는 만큼 보수적인 전제를 깔고 경제를 전망했다고 한다. 특히 우크라이나 사태가 겨울철까지 이어지고 미국의 금리 인상이 예상보다 빨라지는 상황을 가정했고, 수출 둔화 폭이 점차 확대되면서 성장 흐름이 약화될 것으로 봤다. 그런데도 성장률 하향 조정 폭이 0.1%포인트에 그친 것은 민간소비 회복 모멘텀이 강하기 때문이다. 한은은 올해 민간소비 증가율이 4.0%로 지난해 연간 증가율(3.7%)보다 높다고 봤다. 다시 말해 매우 강한 소비가 성장률을 밀어 올린다는 것이다.
한 총리가 낮은 성장률 전망치를 언급한 것도 이와 같은 민간소비의 가파른 증가세를 몰랐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기자간담회에서 정부와의 경기 인식에 차이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예상보다 세계 경제가 나빠지면서 올해 성장률도 많이 나빠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지난 2개월 동안 나온 소비가 생각보다 굉장히 좋았다”라며 “한 총리는 예상 밖으로 소비가 좋다는 자료가 나오기 전에 말한 것이고 지금의 인식은 정부나 저희(한은)가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민간소비 흐름이 심상치 않다는 조짐은 지난달 26일 올해 2분기 국내총생산(GDP)이 발표될 때부터 나타났다. 당시 금융시장에서는 2분기 GDP가 0.3~0.4% 성장하는 데 그칠 것으로 예상했는데 실제 발표된 수치는 0.7%였다. 특히 민간소비의 성장률 기여도가 1.4%포인트로 전 분기(-0.2%포인트) 대비 큰 폭으로 상승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면서 억눌렸던 소비가 의류·신발 등 준내구재와 음식·숙박과 오락·문화 등 서비스 소비가 예상보다 크게 늘었던 것이다.
다만 이후로도 소비 회복 흐름이 이어지는 것은 거리두기 해제만으론 설명되지 않는다. 소비 회복 이면에는 고물가·고금리에도 소비를 늘릴 수 있을 만큼 소득이 나아졌다는 결론이 나온다. 통계청 2분기 가계동향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구당 월평균 소득은 483만 1000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2.7%나 증가했다. 물가 상승 영향을 제외한 상승률은 6.9%다. 명목소득과 실질소득 모두 2006년 이후 증가율이 가장 높다. 심지어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늘어나는 3분기에도 카드 지출액이 늘고 있다. 음식, 숙박, 외식에 여행, 예술, 스포츠, 여가 등을 중심으로 소비가 이뤄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김웅 한은 조사국장은 “거리두기 해제로 인한 펜트업 수요도 있지만 소비가 좋은 이유는 소득 여건이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라며 “일단 근로소득이 늘었는데 고용도 많이 증가했고 임금도 많이 올랐다. 자영업자들이 벌어들인 돈도 있고 추가경정예산안 80조 원으로 인한 이전소득도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소비 회복세가 수요 측 물가 상승 압력으로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외식 물가를 살펴보면 재료비 상승 등 공급 측 요인도 물론 있지만 수요가 받쳐주지 않았다면 가격을 마냥 올리기 쉽지 않다. 그만큼 수요 측 물가 상승 압력이 크다는 이야기다. 김 국장은 “근원물가를 보면 절반 정도는 수요 측이고 나머지 절반이 공급 측 요인”이라며 “유가가 상당히 오르고 식량 가격도 올라서 물가가 많이 오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면에는 수요 측 물가 압력도 상당하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문제는 경상수지 악화다. 최근 수출 둔화와 함께 수입 가격이 급등하면서 무역수지 적자가 5개월 연속 이어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에 한은은 올해 경상수지 흑자 폭을 500억 달러에서 370억 달러로 130억 달러나 줄였다. 내년은 340억 달러를 예상했다. 특히 경상수지 흑자 폭 감소 배경에는 해외여행 확대로 인한 서비스수지 적자 영향이 반영됐다. 한은은 서비스수지가 올해 상반기 5억 달러 흑자에서 하반기 60억 달러 적자로 전환한 이후 내년 상반기 -91억 달러, 하반기 -109억 달러로 적자가 큰 폭 확대될 것으로 봤다. 운송수지 호조에도 방역 조치가 완화되면서 내국인 해외여행이 본격화되는 시점과 맞물려 있다.
※ ‘조지원의 BOK리포트’는 국내외 경제 흐름을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도록 한국은행을 중심으로 경제학계 전반의 소식을 전하는 연재입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