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인플레이션과 금리 상승 국면에서 각국 증시가 조정을 받은 가운데 국민연금이 수익률 방어에 실패하면서 올 상반기에만 77조 원에 이르는 최악의 손실을 기록한 것으로 집계됐다. 국민연금은 올해 상반기 특히 국내 주식에서 20%의 손실을 기록해 가장 많은 돈을 날렸다. 국민연금이 상반기에 손실을 본 금액은 592만 명(3월 말 기준)의 수급자들이 2년 반가량 받을 수 있는 연금에 육박해 기금 운용 능력의 중요성이 재차 부각될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29일 공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까지 누적 운용수익률은 -8.0%를 기록했다. 5월까지 수익률이 -4.73%였는데 한 달 만에 3.27%포인트나 추가로 하락한 것이다. 이에 따라 기금 운용 자산은 6월 말 기준 총 882조 7000억 원으로 한 달 전(912조 3550억 원)보다 29조 6550억 원 감소해 1년 만에 900조 원대가 붕괴됐다.
올해 연금보험료 수입이 줄곧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운용수익률이 계속 추락하면서 상반기 손실이 76조 7000억 원까지 불어나자 지난해 말 950조 원에 육박했던 국민연금 기금 규모도 800조 원대로 주저앉은 것이다.
국민연금의 올 상반기 손실액은 2020년 전체 수익금인 72조 1000억 원과 비교해도 4조 원 이상 많은 것일 뿐 아니라 올 3월 기준 매달 592만 명에게 2조 6000억 원의 연금이 지급되는 것을 고려하면 향후 2년 반 동안 연금을 줄 수 있는 돈이다.
상반기 국민연금의 수익률이 추락한 주요인은 국내외 주식 투자 부문에서 두 자릿수 손실을 기록한 것이다. 국민연금은 6월 말 기준 국내 주식 투자 평가액이 132조 원이고 -19.58%의 수익률을 기록했다고 밝혀 올 들어 한국 증시에서 30조 원 넘는 손실을 본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연금 전체 자산 가운데 국내 주식 비중은 15% 정도인데 전체 손실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0%에 이르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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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은 또 6월까지 해외 주식에서 -12.59%의 수익률을 기록해 평가액이 235조 8000억 원으로 줄었다고 밝혔다. 해외 주식이 전체 자산에서 26.7%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상반기 손실은 35조 원을 훌쩍 넘은 것으로 추산됐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통화 긴축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우려로 증시 변동성이 커진 상황” 이라며 “전 세계 투자심리가 얼어붙으면서 주식 투자 손실 폭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채권도 평가손실이 크게 늘었다. 국내 채권과 해외 채권은 각각 상반기까지 5.80%, 1.55%의 손실을 기록했다. 다만 해외 채권은 5월(-2.5%) 수익률과 비교하면 6월 들어 수익률이 소폭 회복한 것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135조 원에 달하는 대체투자 부문은 국민연금 수익률에 또 다른 복병으로 지목된다. 국민연금은 6월까지 부동산 등 대체투자 수익률이 7.25%로 유일하게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밝혔지만 이는 배당 수익과 환차익 등만 반영된 것이다. 부동산과 사모펀드 투자 등에 대한 공정가치 평가는 연말에 한 차례만 단행하는데 이를 반영할 경우 대체투자 역시 수익률이 크게 하향 조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투자은행 업계의 한 관계자는 “글로벌 금리 상승에 따라 부동산 등 대체투자 자산의 가치도 상당 폭 하락했다”고 전했다.
국민연금은 상반기 사상 최대 손실을 공표하면서 여론 악화가 예상되자 이례적으로 보도 자료를 통해 8월까지는 운용수익률이 약 -4%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역시 이달 25일까지 국내외 증시가 좋아진 상황만을 반영했다는 지적이다. 26일(현지 시간) 미국 나스닥이 4% 급락하고 29일 국내 증시가 2%대 하락세를 보인 점 등 국민연금 운용수익률에 악재가 될 수 있는 부분은 못 본 채 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이 올 들어 최악의 운용 손실을 기록하면서 연간 손실 우려도 커지게 됐다. 국민연금은 1999년 기금운용본부 출범 이후 2008년과 2018년 두 번의 연간 손실을 기록한 바 있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6월 국내외 증시 하락으로 전월 대비 손실 폭이 커진 상황”이라며 “위험자산 관리에 주력하면서 하반기 수익률 회복에 주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국민연금 운용 손실이 사상 최대를 기록하면서 공석인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을 조속히 선임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커지고 있다. 특히 국민연금 이사장 자리를 놓고 김태현 한국예금보험공사 사장과 김용하 순천향대 IT금융경영학과 교수가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기금 수익률 향상을 위해 전문성이 높은 김 사장에게 적임자로서 힘이 실리게 됐다. 김 사장은 금융위원회에서 자산운용과장과 자본시장국장·금융정책국장 등을 지낸 금융 전문가인 데 비해 김 교수는 연금 전문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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