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對)중국 정책은 주위 우방국과 함께 중국을 포위하는 구도로 변모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 미국·인도·일본·호주 등 4개국 동맹인 ‘쿼드(QUAD)’를 비롯해 미국·영국·호주의 안보 동맹인 ‘오커스(AUKUS)’를 출범시켰다. 경제와 관련해서도 중국을 배제한 포괄적 경제협력체 출범으로 중국을 압박하고 나섰다. 대표 사례가 올 5월 출범한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IPEF)’ 및 이달 한국·미국·일본·대만 등 4자 간 예비 회동이 예정된 ‘칩4(팹4)’다.
윤석열 정부는 IPEF와 칩4 모두 중국 견제용 협력체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여기에 참여하기로 했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미국은 중국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품목이 있을 경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통상 전략을 수립하고 있으며 기술 부문도 동맹국을 중심으로 신규 질서를 수립 중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미국 주도 협력체 참여는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도 “한국의 높은 중국 의존도가 두고두고 화근이 될 수 있다”며 “중국이 러시아와 동맹을 강화하고 미국이 중국에 대한 압박을 지속하는 만큼 우리는 결국 미국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7일 관계 부처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를 비롯한 관련 부처도 이달 예정된 칩4 관련 예비 회동을 앞두고 의제 조율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이 중국에서 대규모 메모리 공장을 운영하는 만큼 칩4 참여에 따른 중국 당국의 반발을 우려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이 때문에 정부는 중국이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반영해 칩4를 ‘4개국 간 협의체’가 아닌 ‘4자 간 협의체’라 명명하는 등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 현재 이들 4개국 간에 칩4 의제는 공유되지 않은 상태이며 조만간 있을 예비 회동에서야 공개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칩4 참여국 가운데 한국 특유의 상황을 잘 활용한다면 미중 간 틈바구니 속에서 국내 반도체 업계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미국·일본·대만과 달리 한국은 중국에 대규모 공장을 운영 중이기 때문에 첨단 장비의 중국 수출제한과 같은 미국 측 규제에 한국이 오히려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며 “이 때문에 중국은 한국이 칩4 가입 시 중국 내 반도체 수급 부문에서 어느 정도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듯하다”고 말했다. 중국이 칩4에 자신의 입장을 반영할 지렛대로 한국을 활용할 여지가 있다는 의미다.
설사 중국이 강하게 반발한다 하더라도 한국의 반도체 생산구조를 보면 칩4 가입은 필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기준 한국의 반도체 장비 수입의존도는 미국(25.7%), 일본(25.0%), 네덜란드(25.0%) 순으로 미국이나 일본 장비가 없으면 반도체를 만들 수 없는 구조다. 소재 수입의존도 역시 일본(35.2%), 미국(9.5%)의 비중이 높다.
무엇보다 칩4로 중국 반도체 산업에 대한 견제가 본격화할 경우 초격차 확보가 더 쉬워진다. 실제 중국과의 수출 경합도는 2010~2015년 평균 0.819에서 2016~2020년 평균 0.833으로 높아져 중국이 해외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의 최대 경쟁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반도체 규제에 대응해 반도체 장비 국산화율을 지난해 21%에서 올 상반기 32%까지 끌어올리는 등 ‘반도체 굴기’를 지속하고 있다. 다만 극자외선노광장비(EUV) 관련 기술력 확보는 상당 시일이 걸리는 만큼 초미세 반도체 공정에서 중국과 한국 간 격차는 더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질서 있는 탈중국 전략 추진을 위해서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가 가입을 추진 중인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은 현재 일본이 주도하고 있다. CPTPP는 올 2월 발표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대비 참여 국가 수는 적지만 시장 개방률은 10%포인트가량 높아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이 가입해야 하는 필수 협정으로 분류된다. 북미에서 조립된 전기차에만 보조급을 지급하도록 하는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관련해서도 한국과 일본이 공동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 교수는 “일본 수출규제 이후 우리 정부는 소재·부품·장비 독립을 외쳤지만 확실하게 대체했다고 할 수 있는 품목이 별로 없으며 이마저도 일본에서 바로 수입하던 품목을 다른 나라를 거쳐 수입하는 형태가 대부분”이라며 “결과적으로 매우 비효율적인 대응이었으며 우방국끼리는 외교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현욱 한국개발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우리로서는 무역 부문에서 중국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낮추고 공급망 분산 등의 노력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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