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005930)에 ‘갑질’한 혐의로 제재를 앞두고 있던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면죄부를 받았습니다. 공정위의 조사를 받은 기업이 과징금 등을 물지 않고 스스로 피해 보상 방안을 마련하는 ‘동의의결’ 신청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브로드컴의 과징금 규모로 수십억 원에서 조 단위까지 거론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공정위의 결정에는 의아함이 남습니다. 공정위는 왜 이런 결정을 내린 걸까요?
◇브로드컴, 뭘 잘못했나
공정위는 지난달 26일과 31일 두 차례 전원회의를 열어 심의한 결과 브로드컴의 동의의결 절차를 개시한다고 7일 밝혔습니다. 동의의결은 공정위 조사를 받은 사업자가 스스로 피해 구제 등 타당한 시정 방안을 제시하면 위법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사건을 신속 종결하는 제도입니다.
애초 브로드컴은 삼성전자에 장기 계약 체결을 강제해 수십억 원 이상의 과징금을 물어야 할 것으로 전망됐습니다. 과징금 규모가 1조 원을 넘을 것이란 예상도 있었습니다. 삼성전자가 통신칩 등 자사 부품을 매년 7억 6000만 달러 이상씩 3년간 구매하고 실제 구매 금액이 이에 미달하면 차액을 배상한다는 내용의 불리한 계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입니다. 공정위는 이 과정에서 브로드컴이 구매 주문 승인 중단, 선적 중단, 기술지원 중단 등을 이용해 거래상 지위를 남용했다고 보고 사건을 심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브로드컴은 7월 공정위에 동의의결 개시를 신청했습니다. 불공정한 수단으로 부품 공급계약 체결을 강제하는 행위 및 경쟁 사업자 배제 행위 등을 중단하겠다는 내용의 시정 방안이 제출됐습니다. 상생기금을 마련해 반도체·정보기술(IT) 산업 분야의 중소 사업자를 지원하고 반도체 설계 전문인력을 양성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됐습니다.
◇‘선도적 기업’끼리의 사건
공정위가 공식적으로 밝힌 동의의결 인용 결정의 배경 중 눈에 띄는 대목은 ‘선도적 기업’이라는 표현입니다. 공정위는 “스마트기기 부품의 기술 개발 속도가 빠르고 동태적 경쟁이 이뤄져 동의의결로 신속히 사건을 마무리할 실익이 크다”며 “선도적 위치에 있는 거래 당사자 간 사건이라 동의의결로 거래 질서 개선을 도모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통상 공정위가 다루는 사건에는 불공정 행위의 주체인 ‘갑’과 피해를 본 ‘을’이 존재합니다. 가령 카카오모빌리티의 경우 가맹 택시에 콜을 몰아줬다는 혐의로 공정위의 제재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를 받은 상태입니다. 카카오모빌리티는 갑, 배차 과정에서 차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비가맹택시(일반택시)는 을이 됩니다. 이렇게 을이 약자일 때는 공정위가 강력한 제재를 내려야 갑의 불공정 행위가 개선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일반적인 사건의 을과 비교하기 어려운 ‘슈퍼 을’에 해당합니다.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선도적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삼성전자가 브로드컴으로부터 ‘갑질’을 당하긴 했지만 과징금 없이 ‘자진 시정’ 약속만으로도 상황이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이 공정위의 판단입니다.
◇'동의의결' 활성화 예고?
윤석열 정부의 ‘시장 친화’ 기조와 함께 공정위가 동의의결 절차를 활성화하려는 움직임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동의의결제도가 도입된 2011년 이후 동의의결 신청이 받아들여진 경우는 10건에 불과합니다. 지금까지는 겨우 1년에 1번 꼴로 동의의결 제도가 활용된 것입니다.
지난 8일 임기를 마친 조성욱 전 공정거래위원장은 앞서 “동의의결 제도의 가장 큰 장점은 사건을 신속히 종결해 현재 시장 상황에 맞는 적시의 조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라며 “정보통신기술(ICT) 사건은 (동의의결을 활용해) 적시 조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실제 공정위는 최근 동의의결을 신청할 수 있는 사건의 범위를 확대한 상태입니다. 올 하반기부터는 기존 공정거래법·표시광고법 위반 사건뿐 아니라 가맹·유통·대리점 사건에서도 동의의결을 신청할 수 있게 됐습니다.
◇‘동의의결=면죄부’ 논란 넘어야
하지만 동의의결 절차가 활성화되려면 동의의결이 곧 기업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는 우려를 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이 제출한 시정방안이 실제로 이행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사후관리가 철저히 이뤄져야 합니다.
앞서 공정위는 동의의결을 신청했던 애플이 약속한 시정방안을 부실하게 이행했음을 확인하고 제재 성격의 이행 강제금을 부과하기도 했습니다. 감시가 느슨해지면 언제든 비슷한 일이 나타날 수 있는 셈입니다.
공정위 관계자는 “동의의결 제도를 활용하면 갑을관계 및 소액·다수 소비자 분쟁 관련 신속하고 자발적인 피해 구제를 도모할 수 있다”며 “동의의결 제도 활성화 및 개선을 위해 계속 소통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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