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회계 업계는 2019년 격변의 해를 맞았다. 한국 최대 기업인 삼성전자(005930)의 회계감사인이 40여년 만에 처음 바뀐 것이 이를 상징한다. 양대 금융그룹인 신한지주(055550)와 KB금융(105560)도 10여년 만에 처음 새 회계법인을 감사인으로 받아들였다. 정부가 ‘주기적감사인지정제’로 포장해 사실상 대기업 감사인을 강제 할당하며 회계법인을 지정했기 때문이다. 첫 족쇄가 채워진 기업들의 3년 기한이 내년에 풀리자 회계 업계는 이전에 없던 기회를 맞아 한 곳이라도 더 감사를 수임하려 총력전에 나섰다. 정부가 지정한 회계법인과 3년의 동거를 무사히(?) 마친 기업들은 새 감사인 선정을 놓고 자칫 ‘재무 안정성이 흔들릴까’ 불안 속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한 대형 회계법인의 임원은 18일 “주기적감사인지정제 시행 첫해에 지정된 대기업들은 모두 내년부터 자유의 몸이 돼 회계 업계에 ‘큰 장’이 섰다”면서 “200개 넘는 상장사들의 새 감사인 수임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업계 판도마저 바뀔 수 있어 회계법인들 간 경쟁이 치열하다”고 말했다. 기업들의 새 외부감사인 선임은 통상 전년도 10월까지 이뤄진다.
시장에서 주목하는 ‘최대어’는 단연 삼성전자다. 자산 규모만 448조 원에 달하고 ‘대한민국 1위 기업’으로서 감사 수임에 따른 수익과 상징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해외에 수많은 사업장을 두고 있어 어지간한 회계법인은 연결 재무제표 감사를 맡기 어렵다”고 말했다.
회계 시장 1·2위인 삼일PwC와 삼정KPMG는 최근 삼성전자 수임을 두고 건곤일척의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다. 삼일PwC는 정부 지정으로 삼성전자 감사인이 딜로이트안진으로 바뀌기 전까지 40년 이상 회계 감사를 맡아온 인연을 앞세워 감사인 수임에 나서고 있는데 현재 수임 중인 삼성전자에 대한 각종 컨설팅을 정리할 계획을 세울 만큼 ‘총력전’으로 나서고 있다.
삼정KPMG는 삼성전자가 삼일과 ‘밀착’ 논란을 우려하는 것을 앞세워 감사인 수주를 노리고 있다. 공인회계사 수가 삼일PwC와 비슷한 2000명대로 삼성전자의 감사 난도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삼성전자 고위층을 설득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는 최근 3년간 딜로이트안진의 감사 품질에 만족해 “삼일이 아닌 다른 대형사도 검토할 만하다”는 기류가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재무·회계 안정성이 계속 흔들리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커 고심 중이다.
SK하이닉스(000660)와 카카오·CJ제일제당(097950)·GS건설 등도 삼성전자와 마찬가지 입장에서 새 회계법인과 감사 계약을 앞두고 있다. SK하이닉스는 2014~2019년 삼정KPMG의 감사를 받았다가 이후 삼일PwC를 지정 받았고 CJ제일제당은 삼일PwC에서 EY한영으로 감사인이 강제 교체된 바 있다.
금융 업계를 대표하는 기업들도 일제히 감사인을 교체한다. KB금융과 신한지주, 최대 생명보험사인 삼성생명(032830), 증권 업계 1위 미래에셋증권(006800)이 모두 감사인을 새로 선임할 예정이다. 당장 보험업을 하고 있는 금융그룹이나 금융회사들이 빠르게 감사인 선임을 추진 중이다.
보험 부채를 원가에서 시가로 바꾸는 것을 골자로 하는 새 회계기준(IFRS17)이 내년 1월부터 시행되기 때문이다. 이미 신한지주는 내년부터 새 감사인으로 삼정KPMG를 선임해 최근 감사 계약을 체결했다. KB금융의 차기 감사인으로는 삼일PwC가 유력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회계법인 임원은 “내년부터 새 회계기준이 적용되는 보험사나 보험 계열사를 둔 금융그룹은 올해 사전 감사를 받아야 기한 내에 감사를 끝낼 수 있어 새 감사인 선임에 속도를 내고 있다”고 전했다.
재계와 회계 업계에서는 ‘주기적감사인지정제’로 매년 회계 감사 시장과 기업들이 들썩일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주기적지정제는 상장사가 6년간 감사인을 자유 선임할 경우 그 후 3년은 정부가 지정해준 회계법인의 감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금융 당국이 2019년 10월 이후 매년 지정 감사 법인을 선정해 오면서 2019년 220개였던 지정 감사 법인은 2020년 434개(누적 기준), 2021년 593개로 각각 증가했다.
재계에서는 아직까지도 주기적지정제 적응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모습이다. 재계에서는 계속 감사인이 바뀔 경우 회계 처리를 두고 전·후임 감사인이나 감사·피감사인 간 갈등이 커질 우려가 크다고 지적한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회계 처리를 두고 갈등이 커지는 것이 오히려 회계 투명성 강화에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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