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삼성전자(005930)가 메모리와 시스템반도체를 불문하고 최첨단 기술 계획을 잇따라 과시하는 것은 현 복합 위기가 거꾸로 세계 패권을 장악할 또 다른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경쟁사들이 생산·투자 축소 등으로 주춤하는 사이 초격차 기술로 다가올 경기 반등 국면을 미리 대비하겠다는 포석도 깔렸다는 분석이다. 특히 이재용 부회장이 연일 경영진에 ‘기술 경영’을 강조하면서 시장 대응 전략과 미래 목표를 한층 과감하게 끌어올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로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장인 이정배 사장이 5일(현지 시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열린 ‘삼성 테크 데이’에서 소개한 8세대 V낸드플래시는 단위 면적당 저장되는 비트 수가 7세대보다 42%나 많은 제품이다. 이 사장은 8세대 V낸드플래시 512Gb(기가비트) TLC(1개 셀에 3개 비트 저장) 제품도 공개하며 현존하는 512Gb TLC 제품 중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하기도 했다. 나아가 2030년을 개발 시점으로 내건 1000단 V낸드플래시는 업계에서 ‘꿈의 영역’으로 통하는 기술이다.
내년에 양산되는 5세대 10㎚(나노미터·10억분의 1m)급 D램은 기존 같은 사양의 4세대보다 크기는 작고 성능은 더 뛰어난 제품이다. 경쟁사가 4세대 14나노급 D램을 생산하는 상황에서 기술 격차를 한 차원 더 벌리는 셈이다.
차량용 메모리 시장에서도 자율주행(AD), 첨단주행보조시스템(ADAS), 인포테인먼트(IVI) 등에 필요한 최적의 메모리 솔루션을 공급해 3년 뒤 세계 1위를 휩쓸겠다는 복안을 제시했다.
이 사장은 “삼성전자가 약 40년간 만들어낸 총 메모리 저장 용량 1조GB(기가바이트) 중 절반은 최근 3년간 만들어졌다”며 “앞으로 고대역폭·고용량·고효율 메모리로 새로운 플랫폼과 상호 진화하며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이 같은 세계 최초 기술들을 순차적으로 달성할 경우 당분간 메모리 기술 주도권을 쉽게 내주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삼성전자는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1993년 이후 30년째 1위 왕좌를 지키고 있다. D램과 낸드플래시는 각각 1992년, 2002년 1위에 올랐다. 대만의 시장조사 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 2분기에도 삼성전자는 세계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33.0% 점유율로 부동의 1위를 지켰다. 그 뒤를 SK하이닉스(000660)(19.9%·자회사 솔리다임 포함), 일본 기옥시아(15.6%), 미국 웨스턴디지털(13.2%), 미국 마이크론(12.6%) 등이 이었다. 같은 시기 글로벌 D램 시장에서도 삼성전자는 43.5% 점유율을 기록해 2위 SK하이닉스(27.4%), 3위 마이크론(24.5%)을 여유 있게 따돌렸다. 복합 위기를 틈 탄 기술 개발 속도전으로 이 격차가 더 커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이날 시스템LSI 사업부장인 박용인 사장이 공개한 ‘통합 솔루션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회사)’ 구상도 업계의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무엇보다 “시스템온칩(SoC)·이미지센서·모뎀 등 900여 개의 시스템반도체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다”는 박 사장의 발언이 눈길을 끌었다. 삼성전자가 시스템반도체 포트폴리오 보유 수를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전 세계적으로도 이 정도로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보유한 기업은 극소수다.
박 사장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초지능화·초연결성·초데이터가 요구된다. 인간 수준에 근접하는 성능을 가진 최첨단 시스템반도체를 개발하겠다”고도 역설했다. 데이터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시대에 메모리와 시스템반도체를 융복합한 미래 기술을 지향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삼성전자는 또 소프트웨어 부문 육성을 위해 앞으로 한국·미국 등에 삼성메모리리서치센터(SMRC)를 순차적으로 선보이기로 했다. 레드햇·구글클라우드 등 글로벌 소프트웨어 업체와의 협력도 확대할 방침이다.
삼성전자는 앞서 3일에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열린 ‘삼성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포럼’에서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기반 공정 기술을 바탕으로 2025년 2㎚, 2027년 1.4㎚ 공정을 도입할 계획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올 6월 대만 TSMC보다 앞서 세계 최초로 3㎚ 공정을 양산한 데 이어 파운드리 부문에서도 기술 개발에 가속도를 내는 모양새다.
재계에서는 최근 삼성전자의 기술 목표가 쉬지 않고 높아지는 데는 이 부회장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됐다고 보고 있다. 앞서 이 부회장은 올 6월 유럽 출장 귀국길에서 “첫 번째도 기술, 두 번째도 기술, 세 번째도 기술”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후 광복절 복권 이후 첫 공개 행사였던 8월 19일 경기 기흥 반도체사업장 연구개발(R&D)단지 기공식에서도 임직원들에게 “위기에 흔들리지 않고 글로벌 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초격차 기술력을 확보해야 한다”며 “선행 투자의 전통을 이어 나가자. 세상에 없는 기술로 미래를 만들자”고 거듭 당부했다. 이 부회장은 지난달 삼성 계열사 국내외 사업장 방문, 전자·금융 계열사 사장단 오찬에서도 잇따라 기술 경영의 중요성을 설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