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력이 올해 계통망 구축 예산을 애초 계획 대비 4500억 원가량 삭감한 것으로 확인됐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 에너지 가격 급등 등으로 올해 최대 40조 원에 가까운 영업손실이 예상되고 있는 한전이 본업이라 할 계통망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힘든 환경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전력 인프라 구축이 흔들리면 가정용·산업용 전력의 적기 공급이 어려워져 최악의 경우 ‘블랙아웃(대정전)’까지 발생할 수 있다.
11일 한전의 ‘중장기 재무관리계획’에 따르면 한전은 올해 송·변전 설비에 2조 5444억 원, 배전 설비에 3조 4185억 원을 각각 투자한다. 한전은 올 초만 해도 송·변전 설비에 2조 7943억 원, 배전 설비에 3조 6128억 원의 예산을 각각 배정했다. 한전이 중장기 재무관리계획을 올 6월에 작성했음을 감안하면 반년 새 관련 예산이 4446억 원가량 빠진 셈이다.
시장에서는 한전의 재정 악화가 계통망 부실로 이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전은 문재인 정부의 ‘묻지마 신재생’ 정책에 따라 최근 몇 년간 신재생 계통망 연결을 위한 배전 설비에 애초 계획 대비 1700억~5000억 원가량을 추가 투자해 왔기 때문이다. 실제 2018년에 배정한 배전 설비 예산은 2조 8808억 원이었지만 집행액은 3조 3088억 원에 달했다. 지난해 관련 집행액도 애초 예산 대비 1787억 원 늘어난 3조 7673억 원이었다. 반면 올해 배전 설비 예산은 2000억 원가량 줄었다.
전문가들은 송·변전 예산 미집행에 따른 전력 대란 현실화를 염려하고 있다. 한전은 지난해 2조 8044억 원을 송·변전 예산으로 설정했지만 실제 집행은 2조 6233억 원에 그쳤고 2020년에도 예산과 집행액과의 차이가 무려 3419억 원에 달했다.
이 같은 한전의 계통망 설비 예산 삭감은 블랙아웃 발생 가능성 증가로 이어진다. 특히 강원 지역과 수도권을 잇는 송·변전선 구축 작업 지연에 대한 업계의 우려가 상당하다.
한전에 따르면 강릉 안인화력발전소 1·2호기에 연결되는 송전망은 애초 계획 대비 몇 년 늦어진 2026년 10월에나 구축이 완료된다. 또 신한울과 신가평을 잇는 초고압직류송전선로(HVDC)는 2025년 6월에, 신한울과 수도권을 잇는 HVDC 설비는 2026년 6월에 각각 구축이 완료될 것으로 알려졌다.
계통망 미비로 이미 완공된 기가와트(GW)급의 발전설비가 수년간 가동을 못하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해당 발전설비 운영 업체의 반발도 커지고 있다.
한전의 이런 전력망 투자 삭감 기조는 이후에도 계속될 여지가 크다. 영업손실이 눈덩이처럼 커져 투자 여력이 소진되고 있는 탓이다. 결국 전기요금을 올려야 하는데 물가 잡기에 정권 명운을 걸고 있는 윤석열 정부로서는 쉽게 빼 들 수 있는 카드라고 보기 어렵다. 실제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국감에서 “한전 적자를 단기간에 해결하려고 하면 전기요금이 폭등하고 국민이 정말 어려워진다”고 밝혔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한전의 중장기 재무 계획은 ‘장밋빛’으로 가득 차 있어 재무 계획을 원점에서 새로 수립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전은 향후 5년간 ‘연료비연동제’가 정상적으로 운용되고 원·달러 환율도 현재 대비 20%가량 낮은 1200원 초반대에 머물 것이라는 가정 아래 2026년까지 매년 5조 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거둘 것으로 보고 있다. 한전은 이런 영업이익 기대치에 맞춰 올해 2조 5444억 원에 불과한 송·변전 예산을 내년 2조 9034억원으로 확대한 후 2026년에는 3조 6452억 원까지 추가로 늘린다는 방침이지만 실현 가능성은 낮다.
산업통상자원부도 지난해 ‘전력계통혁신과’를 신설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한전 부채 문제 때문에 계통망 이슈는 정책 우선순위에서 크게 밀려난 양상이다. 산업부는 지난 연말 기존 대비 30조 원이 늘어난 78조 원을 2030년까지 전력망 보강에 투자하겠다는 내용의 ‘전력계통 혁신방안’을 발표했지만 관련 비용의 대부분은 한전이 떠안도록 설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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