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랜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사태 이후 자금 시장 경색으로 한국은행의 금리 인상 행보에 제동이 걸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한은이 통화정책에서 중요하게 살펴보는 지표 중 하나인 기대인플레이션이 석 달 만에 상승 전환하고 원·달러 환율마저 장중 연고점을 경신하는 등 금리 대응 필요성은 오히려 커지고 있다. 다음 달 금융통화위원회에서 빅스텝(0.50%포인트 금리 인상)을 하자니 자금 시장의 불안이 심상치 않고 베이비스텝(0.25%포인트 금리 인상)을 하자니 물가를 잡지 못하고 실기(失期)할 수 있다는 우려에 한은은 딜레마에 빠졌다.
25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10월 소비자 동향 조사에 따르면 기대인플레이션율은 4.3%로 전월 대비 0.1%포인트 올랐다. 기대인플레이션은 7월 4.7%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 뒤 8월(4.3%)과 9월(4.2%) 두 달 연속 내림세를 보였으나 3개월 만에 상승 전환했다. 과거 1년에 대한 물가 수준을 묻는 ‘물가 인식’은 5.2%로 전월 대비 0.1%포인트 상승했다.
향후 1년간 소비자물가 상승에 영향을 미칠 품목으로 61.9%(중복 응답)가 공공요금을 꼽을 만큼 전기·가스요금 인상이 물가 불안으로 이어지는 상황이다. 황희진 한은 통계조사팀장은 “전기·가스 등 공공요금 인상, 석유수출국기구(OPEC) 플러스의 감산 결정, 외식 가격 상승 지속 등으로 소비자들의 체감 물가가 낮지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7월과 10월 두 차례의 빅스텝에도 기대인플레이션이 잡히지 않은 것은 그만큼 물가 안정이 쉽지 않다는 의미다. 기대인플레이션이 높으면 근로자의 임금 인상 요구와 기업의 제품 가격 인상이 이뤄져 물가가 다시 오르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최근 1400원이 넘는 고환율 역시 수입 물가를 통해 국내 물가를 끌어 올리는 주요 요인이다. 한은은 5~6%대 고물가가 상당 기간 지속되는 만큼 금리 인상 기조를 이어갈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연일 강조하고 있다.
문제는 물가·환율 안정을 위해 긴축 강도를 점차 높여가는 상황에서 레고랜드 ABCP 사태가 터졌다는 점이다. ABCP 사태 이후 단기자금 시장을 중심으로 돈이 제대로 돌지 않으면서 기업들이 흑자 도산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시장에서는 가파른 금리 인상이 이번 사태의 근본적 원인이라며 이번에는 빅스텝보다는 베이비스텝이 적절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갈수록 커지는 경기 침체 우려에 10월 금통위에서 빅스텝에 반대하는 소수의견을 낸 금통위원이 두 명 나온 것도 베이비스텝의 가능성을 키우는 요인이다.
정부가 이달 23일 발표한 50조 원 이상의 자금 공급 대책이 통하지 않는다면 한은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요구마저 나온다. 다만 한은은 저신용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을 위한 기업유동성지원기구(SPV)나 무제한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 금융안정특별대출 등 직접적인 유동성 공급에는 신중한 입장이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24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금융안정대출이나 SPV 재가동은 지금 적절하지 않은 정책”이라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