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정례적으로 실시하는 환매조건부증권(RP) 매각 입찰에 지난 3일 역대 최대인 400조 원이 넘는 자금이 몰린 것으로 나타났다. 한은이 시중 유동성을 흡수하기 위해 실시하는 정례 RP 매입에 이토록 많은 자금이 쏠린 것은 내부에서도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최근 레고랜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사태 등으로 단기자금시장 경색 우려가 나오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자금이 넘쳐나는 역설적인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응찰 규모 한 달 만에 31조→420조
8일 한은에 따르면 지난 3일 실시한 매각금리 3.0% 모집방식의 7일물 RP 매각에서 응찰액은 418조 3500억 원, 낙찰액은 20조 원을 기록했다. 한은이 RP 매각을 실시한 2006년 이후 역대 최대 응찰 규모다. 한은은 초단기 자금시장금리인 콜금리가 기준금리 수준에서 움직이도록 유도하기 위해 RP 매매 등 공개시장운영을 한다. RP 매각은 한은이 보유하는 증권을 금융기관에 매각하고 만기에 이를 되사는 것이고 RP 매입은 반대 조치다. 한은이 RP 매각을 하면 유동성이 흡수되고, RP를 매입하면 유동성이 공급된다.
RP 매각 응찰 규모는 지난달 12일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2.50%에서 3.00%로 0.50%포인트 인상한 이후부터 급격히 커지고 있다. 매각금리가 2.50%인 10월 6일 RP 매각을 했을 땐 31조 2900억 원(낙찰액 28조 원)이 응찰했는데, 금통위가 있던 10월 12일은 매각금리가 3.00%로 오르면서 88조 6500억 원(낙찰액 22조 원)이 응찰했다. 지난달 20일과 27일에는 각각 92조 7100억 원(낙찰액 20조 원)과 250조 7400억 원(낙찰액 18조 원)이 RP 매각에 응찰했다.
여유로운 지준 상황에 한은에 자금 쏠림
RP 매각 응찰 규모가 최근 한 달 사이에 30조 원 수준에서 100조~400조 원으로 급격히 늘어난 것은 시중 은행의 자금이 그만큼 풍부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최근 금리 인상 등으로 시중에 풀린 돈이 예적금 등으로 쏠리자 은행들의 자금 여력이 충분해졌고, 이에 지급준비율을 충족하고도 자금 사정이 여유로운 상황이다. 최근 정부의 단기자금시장 안정화 대책으로 초단기 1일물 금리가 3% 아래로 하락한 만큼 3%가 넘는 한은의 RP 매각 금리가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의미도 된다.
그러자 은행들이 RP 낙찰을 최대한으로 늘리기 위해 응찰 규모를 높인 영향이 나타났다는 설명이다. 낙찰 금액은 응찰 규모에 비례하기 때문에 경쟁률이 치열할수록 더 많은 자금이 쏠린다. 예를 들면 지난 RP 매각 입찰에서 1조 원을 낙찰받기 위해 5조 원을 응찰했는데 5000억 원만 낙찰받았다면 이번 입찰에는 목표를 채우기 위해 10조 원 이상을 써낸다는 것이다. 한은이 이번에 400조 원이 넘는 돈이 몰린 것을 두고 일시적인 오버비딩(over-bidding)으로 보는 이유다.
지준 마감 여유 때도 자금 쏠릴지 주목해야
한은은 이번에 나타난 이례적 응찰이 지급준비율 규제와도 연관된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급준비금은 예금자의 인출 요구에 대비해 예금액 일정 비율 이상을 중앙은행에 의무적으로 맡기도록 한 자금이다. 지준마감일이 다가오면 은행은 평잔 기준으로 필요한 지준만큼 실제지준을 맡겨야 한다. 은행 입장에서 실제지준이 필요지준보다 부족하다면 과태금을 납부해야 하지만 반대로 실제지준이 필요지준보다 많다면 무수익자금이 발생하게 된다. 초과 지준 상태에서 지준 마감일이 다가온 만큼 최대한 많은 자금을 한은 RP 매각 낙찰을 받아 어떻게든 운용하려는 수요가 겹쳤다는 것이 한은의 설명이다.
한은 관계자는 “지준 마감이 여유로운 상황에서도 RP 매각 응찰액이 급격히 늘어났다면 자금시장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이번엔 그런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기술적인 문제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금융시장의 한 관계자는 “(한은 RP 매각에 자금이 쏠리는 것은) 역설적으로 은행 간 RP나 콜 자금이 넘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라며 “이로 인해 RP 금리가 낮아지면서 증권사들이 자금을 구하기가 더 쉬워지는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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