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아온다. 도망친다. 어딘지도 모를 곳, 어디로 연결된 것인지 알 수 없는 길을 내달린다. 쫓아오는 이가 누구인지 등 뒤로 감춘 오른손에 뭘 숨겼는지는 알 길 없다. 클로즈업 된 커다란 발에서 공포에 휩싸인 다급함이 느껴진다. 초록이 가득하건만 희망은 커녕 불안만 가득한 공간에서 거친 숨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1980년대 민중미술의 거목으로 꼽히는 미술가 신학철(79)의 1973년작 ‘비상탈출’ 연작 3점이 약 반세기 만에 처음 공개됐다. 강남구 역삼동 소재 두남재아트센터에서 12월 20일까지 열리는 기획전 ‘기억의 장면들’을 통해서다. 지난해 개관한 두남재의 네 번째 기획전이다. 한국 근현대미술의 2세대 작가로 분류되는 60~70대 거장으로 신학철,서용선(71), 오원배(69), 정현(66)의 작품들을 모아 선보였다.
전시장에서 만난 신학철 작가는 미공개작에 대해 “음습했던 시절의 불안 같은 게 있었을 것”이라며 “문명에 대한 탈출로 봐야할 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의 대표작이자 시대의 역작으로 꼽히는 ‘한국의 현대사-갑순이와 갑돌이’(1988)도 만날 수 있다. 해방 이후 근대사의 여정을 콜라주 형식으로 제작했다. 산업화와 경제발전의 화려함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과 답답한 현실들이 촘촘하게 박혀있다.
서용선은 인간에 대한 의문을 역사에 대한 관심과 도시에 대한 주목으로 확장시킨 작가다. 한복 입은 사람들이 곡식과 땔감 대신 폭탄을 지게에 짊어지고 나르는 장면을 그린 ‘부역’은 6·25 전쟁 당시, 그의 아버지 세대가 겪었던 실제 사건을 그림으로 옮겼다. 숲에서 걸어나오는 나체의 남성들을 사선형 구도로 그린 ‘젊은 죽음들’은 무장공비들을 생포했다는 신문 기사 속 사진을 토대로 그린 것이라 한다. 이념 대립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인권 유린의 장면을 수긍할 수는 없었던 작가의 복잡한 심경이 생생하게 담겼다.
석유 찌꺼기인 콜타르와 아스팔트, 철근과 침목 같은 ‘버려진 재료’를 사용하는 조각가 정현의 작품들은 산업화 시대 인간의 의미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쓰임을 다 한 재료들로 그가 빚고 그린 것은 소외된 인간, 고뇌하는 사람들이다. 물질들은 버려질지언정 인간이 버려지고, 인간성을 버려서는 안 될 것임을 묵직하게 이야기 한다.
80년대와 90년대를 가로지르는 예술가들의 시선은 오원배의 최신작에 이르러 지금의 현실을 바라본다. 사회구조적으로 소외된 인간과 실존문제를 40년 이상 파고든 작가가 팬데믹의 위기를 거친 후 성큼 다가와 버린 디지털 시대를 커다란 화폭에 담아냈다. 기술 발달로 전 세계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긴밀하게 연결됐지만,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한 격리 상황처럼 인간은 꽉 막힌 방 안에 갇혔을 뿐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지만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서 보려는 인간의 의지, 새장 안은 비어 있지만 ‘파랑새야’를 외치는 간절한 눈빛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박수련 두남재 대표는 “이번 전시의 네 분 작가는 한국전쟁을 전후로 태어나 정치·경제의 구조가 재편되는 시대를 살며 공통된 경험과 기억을 갖는 세대”라며 “형식적이거나 화려한 방식을 구현하지 않으면서도 강렬하고 묵직하게 인간과 인간 내면의 풍경과 장면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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