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중국·싱가포르·호주 등은 대학에 어마어마한 투자를 하고 치열한 경쟁을 시킵니다. 우리가 14년째 대학 등록금을 동결하고 규제만 잔뜩 하는 것과 대조적이지요. 특히 서울·수도권에 좋은 대학들이 밀집해 있는데 국가적 활용 전략이 전혀 없어요.”
서울경제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싱가포르한인과학기술자협회와 함께 25일 싱가포르 마리나베이샌즈 엑스포&컨벤션에서 ‘글로벌 교육혁신·인재양성’을 주제로 연 ‘한·아시아 과학기술 학술대회(AKC) 2022 토크콘서트’에서 전문가들은 이같이 입을 모았다.
조남준 싱가포르한인과기협회장(난양공대 석좌교수)은 “난양공대와 싱가포르국립대는 연간 예산이 3조
원가량인데 정부가 엄청나게 투자하고 그만큼 경쟁을 시킨다”며 “중국 대학은 이보다 더 커 칭화대가 연 7조여 원, 베이징대가 4조~5조여 원으로 한국의 서울대나 KAIST보다 몇 배나 더 규모가 크다”고 지적했다. 중국의 경우 클래스A(36개), 클래스B(6개) 등으로 등급을 나눠 선택과 집중을 한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대학에 많이 투자하고 교육·연구·기술사업화 생태계를 촉진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조언이다. 조 교수는 “한국 대학이 세계 순위에 신경을 많이 쓰는데 정작 브랜드 가치가 있는 대학이 몇 개나 되느냐. 최소 10개는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한정훈 호주·뉴질랜드한인과학기술자협회장(뉴사우스웨일스대 교수)은 “호주는 대학이 40여 개인데 각자 예산 규모가 크지만 등록금 의존율이 낮아 자율성이 높다”며 “특히 공부할 기회는 많이 주지만 졸업생 비율은 절반도 안 될 정도로 치열하게 공부를 시킨다”고 소개했다. 독일· 미국 등의 대학처럼 학생들이 열심히 하지 않으면 졸업할 수 없는 게 한국 대학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글로벌 흐름 속에 우리 정부와 대학도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파괴적인 혁신을 시도해야 한다는 주문이 많았다.
염재호 SK이사회 의장 겸 태재대 초대총장은 “해외 교환학생들이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을 정도로 한국은 매력적”이라며 “더욱이 세계 유례가 없을 정도로 서울·수도권에 굉장히 많이 좋은 대학이 몰려 있는데도 정부가 이것을 잘 활용할 전략이 전혀 없다”고 질타했다. 정부가 4차 산업혁명·기술패권 시대에 걸맞게 교육 혁신과 인재양성에 나서야 하는데 그저 기존의 짜여진 틀에서 규제 위주 행정을 한다는 것이다.
이우일 과총 회장 겸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은 “미국에서는 학비가 수만 달러, 아이비리그대학은 10만 달러에 가까운 곳도 있다”며 “우리는 대학 등록금이 14년째 동결돼 사립유치원보다도 적은 현실에서 투자 여력이 없는데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느냐”고 꼬집었다. 이 회장은 이어 “대학이 유학생용으로 학교 부지에 기숙사를 짓는 것도 종부세 대상이 돼 세금을 많이 낸다”며 비현실적인 규제를 열거했다.
이날 교육 혁신을 통한 인재양성에 대한 아이디어도 많이 제시됐다.
염 총장은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출석을 불러가며 지식을 집어넣으려고 하지 끌어내려고 하지 않는다”며 “학생들이 시험 감독하에 암기했던 것을 가지고 상대평가 받아서야 되겠느냐. 문제해결형 프로젝트로 바꿔야 한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고려대 총장 시절 3무(출석·상대평가·시험감독 없음) 정책을 펴 지금도 고대에서 자율적으로 적잖게 시행되고 있다고 소개했다. 염 총장은 “디지털 대전환에 따른 온라인 교육 비중 확대, 학부 기초교육과 대학원 전공교육 체제로의 이원화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학부를 직업학교처럼 전공 위주로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 회장은 “서울대 등 기존 대학의 시스템을 바꾸기가 참 힘든데 자유로운 아이디어 교환, 플립러닝(예습한 뒤 학생 중심 참여수업), 프로젝트 중심 문제 해결, 창업 등 기술사업화 방향으로 근본적 혁신이 필요하다”며 “특히 대학과 대학원을 동일시하는 게 문제인데 공대의 경우 각 과를 없애고 대학원에서 과를 나눠야 한다”고 역설했다. 서울대의 경우 학부생이 가장 중요한데 인센티브를 줘 과감하게 학부교육의 변화를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조 회장은 “인재양성을 위해서는 미국·싱가포르처럼 다양성이 중요하다”며 “싱가포르는 외국 현장 노동자와 베이비시터뿐 아니라 총장·교수·연구자 등 톱클래스 인재도 많이 유치한다”고 했다. 난양공대의 경우 2011년 베르틸 안데르손 노벨화학상 심사위원장을 총장으로 초청해 대대적인 구조 조정과 함께 톱 교수를 대거 초청했다. 미국 국립과학재단(NSF) 총재를 한 수브라 수레시가 최근까지 총장으로 활동하며 올 초 QS 세계 공대 평가에서 4위를 기록했다. 한 회장은 “호주는 유럽이나 아시아 등에서 학생이 많이 와 싱가포르 이상의 다양성을 보인다”고 전했다.
윤의준 한국에너지공대 총장은 “우리 대학이 연구중심대학으로 가다보니까 교육에 신경을 안 쓰는 경우가 많다”며 “하지만 미국 올린공대 등 해외 사례를 보면 학부 때 교육을 어떻게 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대학원과 사회에서 문제 해결 역량을 키워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