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중대재해 예방 패러다임을 ‘자율 규제’로 전환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면책·적정 기준이 여전히 불명확해 기업들의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어떤 규칙·기준을 설정해야 중대재해로 인한 처벌에서 면책될 수 있는지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자칫 노동조합의 반발과 인건비 증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내년에 이뤄질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개정이 중대재해 처벌법을 둘러싼 논란에 중요한 분수령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정지원 법무법인 율촌 고문은 8일 서울 삼성동 율촌 사무소에서 열린 ‘중대재해법 시행 1년, 시사점과 대응전략’ 웨비나에서 “정부는 지난달 공개한 중대재해법 감축 로드맵에서 노동자 1만 명당 사고 사망자를 0.43명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0.29명으로 줄이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면서 “로드맵의 핵심은 기업 스스로 중대재해를 줄이기 위해 자율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전까진 정부가 모든 기업에 대해 일괄적으로 단일한 기준을 제시했다면 앞으로는 최소한의 규율 하에서 각 기업들이 특성에 맞게 자체적인 안전규칙을 설정해 재해 예방에 나서라는 주문이다. 중대재해 사고는 규모별로는 50인 미만 중소기업에서, 업종별로는 건설업과 제조업에서 대다수가 발생한다. 사고 유형별로는 추락과 끼임, 부딪힘이 절반 이상이다. 이에 각 업종별로 상황에 맞춰 적합한 자율규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게 정부 판단이다.
언뜻 기업 자율성이 높아진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문제는 아직까지 이같은 자율 규제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없어 기업들 사이에서 혼란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정 고문은 “회사마다 안전 규칙이 다를 수 있는데, 적정과 부적정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아직 없다”며 “어느 정도 선까지 규칙을 만들어야 사고 발생시 면책되는지 알 수 없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이어 “정부가 내년에 이뤄질 산안법 개정을 통해 내용을 명료화하겠다는 계획이어서 기업 입장에서는 이를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와중에 노사 간 갈등과 비용 증가 등은 기업이 풀어야 할 숙제다. 정 고문은 “기업들은 '지금도 숨 넘어가게 생겼는데 위험성 평가를 어떻게 더 하느냐’고 울상을 짓고 있는 반면 노동계에서는 ‘기업 봐주기’라고 비판하고 있다”면서 “위험성을 평가하고 위해요인을 점검할 전문 인력이 필요한데 기업 입장에서는 그에 따른 비용 부담도 상당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기업들은 내년 초에 있을 근로감독 계획 및 산안법 개정 등을 지켜보며 대응 전략을 수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 고문은 “정부가 산안법에서 위험성 평가를 단기적으로 의무화할 것으로 보이는데 산업재해 보험료 할증과 폐쇄회로(CC) TV 설치, 근로자 핵심안전수칙 준수 의무를 처벌 면책 기준에 포함시킬 경우 큰 논란이 될 것"이라며 “취업규칙 변경이 근로자들에게 이익인지, 불이익인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영세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처벌을 유예할지 여부도 내년께 결정될 것으로 전망된다”며 “TF 논의과정을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