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냥 귀엽고 유쾌한 게 아니었다. 기괴한 화려함 이면에는 근원적 불안과 경고가 숨어있다.
20대 후반의 무라카미 다카시(61)는 전쟁을 일으켰다 패망한 일본이 전쟁 관련 장난감으로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는 게 괴이했다. 탁자 크기의 플라스틱 상자 표면에 엄지손가락보다도 작지만 정교한 프라모델 군인들이 다닥다닥 붙어 오르는 1991년작 ‘마타마타’의 탄생 배경이다.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지난 26일 개막한 ‘무라카미 다카시:무라카미좀비’전을 통해 처음 공개된 작가의 초기작이다. 같은 해 작업한 ‘란도셀 프로젝트’는 미국 군정의 영향으로 군인용 가방을 본 딴 일본의 어린이용 책가방을 보여준다. 전후 일본 사회에 미성숙한 아이의 이미지를 씌워 ‘귀엽다’고 열광하는 것에 대한 비판과 가방 무게 만큼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고 공부해야 하는 어린 세대를 향한 자조가 뒤섞여 있다.
2002년 루이비통의 제안으로 발표한 ‘멀티컬러 모노그램’으로 패션계에까지 영향을 끼쳤고, 방긋 웃는 ‘무라카미 플라워’는 방석부터 양말까지 ‘짝퉁’이 유통될 정도로 미술가 이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무라카미의 국내 최대 규모 개인전이 부산시립미술관에서 3월 12일까지 열린다. 일본 애니메이션 화풍을 계승한 매끈하고 정교한 그림체로 유명한 무라카미는 요시토모 나라와 함께 ‘일본팝(Japan Pop)’ 1세대 작가로 꼽힌다. 이번 전시는 무라카미의 대표작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극적·상업적이라는 비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작가가 왜 그런 작업을 하는지에 대한 깊은 속내도 들여다볼 수 있기에 의미가 더 크다.
무라카미는 어릴 적 본 ‘은하철도 999’와 ‘미래소년 코난’에서 감명을 받아 대중문화에서 더 큰 경쟁력을 드러내는 일본미술의 본질을 고민했다. 1986년 삼수 끝에 도쿄예술대학에 입학한 그는 ‘일본화’를 전공해 박사학위까지 땄다. 그가 창안한 ‘슈퍼플랫(Superflat)’의 개념은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서구와 일본을 차별없이 ‘평평한 구조’로 해석한다.
전시의 시작은 ‘727 드래곤’이다. 서양인은 드래돈사의 보잉기종 비행기를 떠올리고, 우리나라 관객들은 빅뱅 출신 권지용(GD)의 소장품이라 한 번 더 쳐다보는 작품이다. 일본인들은 국보인 12세기 두루마리 그림 ‘시기산의 전설 에마키’를 생각할 수도 있다. 구름을 비집고 용이 넘실댈 것 같은 자리에 무라카미의 대표캐릭터 도브(DOB)가 등장한다. 무라카미는 1993년에 도라에몽과 슈퍼소닉의 이미지를 결합해 큰 눈과 동그란 얼굴 등 귀여운 요소를 모두 장착한 ‘도브’를 창안했다. 폭 735㎝의 초대형 회화 ‘스파클/탄탄보:영원’(2017)은 ‘도브’를 변형시킨 ‘탄탄보’(가래를 토하는 소년이라는 뜻)가 주인공이다. 금박을 넣어 장식성을 더한 일본 회화의 전통을 차용해 화려하지만 내용은 기괴하다. 작가 자신을 등신상으로 제작한 ‘좀비’ 작품은 뜯겨진 살점과 드러난 내장이 충격적이다. 표정이 일그러질 수 있지만 현대인의 불안과 기형적인 동시대 문명을 ‘좀비 미학’으로 풀어낸 결과물이다.
‘이우환과 그 친구들’의 네 번째 전시를 위해 손수 초청 편지를 쓴 이우환은 “무라카미님의 작품은 얼른 보아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고 화려하다. 그러나 다시 보면 독이 있고 강한 비판성이 감춰져 있어 지나칠 수 없다”고 적었다. 당초 지난해 9월 개막할 예정이던 이번 전시는 태풍으로 노후한 미술관에 비가 새면서 연기됐다. 작가 측에서 항온항습의 국제적 표준을 요구해 무산위기까지 놓였으나 박형준 시장까지 발벗고 나서 어렵사리 막을 올렸다. 전시일정이 미뤄지고 짧아진 것을 놓고 고민한 미술관 측은 1만원 이상의 관람료를 ‘무료’로 결정했다. 보험가액 958억원에 이르는 170여점 작품을 공짜로 볼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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