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뉴욕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들에서 유독 추상 작품들이 많이 보인다. 현재 대형 갤러리와 뮤지엄 등지에서는 20세기 추상회화의 거장들과 더불어 젊은 신진 작가들의 추상 작품이 동시에 조명되고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전후(戰後) 시대를 풍미한 ‘미국 백인' 작가의 추상 작업에 국한되지 않고, 더 다양한 지역 출신의 작가들까지 아우르며 동시에 조명 받고 있다는 것이다. 한동안 미국 내 젊은 여성, 여러 인종의 작가들이 20세기 모더니즘 회화를 재해석한 다양한 구상 회화들의 전시가 많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메가 갤러리인 가고시안(Gagosian) 갤러리는 어퍼이스트 지점에서 사이 톰블리의 후기작들을 선보이고 있다. 1994년 모마(MoMA)에서의 첫 회고전과 제49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라펜타(Lapenta)’ 대형 작업 시리즈가 연이어 성공적인 평가를 받은 톰블리는 후기로 갈수록 작품들의 사이즈를 키운다. 전시장에서는 추상 표현주의에서 중요시 여겼던 작가의 행위와 회화의 물질성에 대한 사이 톰블리의 고민이 담긴 회화, 드로잉, 조각 등 여러 매체의 후기 작업들을 만나볼 수 있다.
평소 시와 고대 신화 같은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톰블리는 문자, 드로잉, 회화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그림은 어린아이가 그린 낙서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으로는 초록색과 빛나는 하얀색으로 구성된 ‘무제 I?VI’(2002~03)가 있다. 이 작품은 2016년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대중에게 처음 공개됐다. 초록 바탕 위에 두텁게 칠해진 흰색 물감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흘러내렸던 순간을 작품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인간에게 신의 물방울을 선사한 포도주의 신 바쿠스의 이름을 딴 ‘바쿠스 (Bacchus)’ 시리즈도 전시됐다. 포도주와 같이 영롱한 붉은 붓 획들로 구성된 작품들은 마치 와인 잔 안에 포도주가 출렁거리는 느낌을 줄 정도로 다이내믹하다. 최근 필립스 뉴욕 경매에 2000년대 바쿠스 시리즈 중 한 작품이 메인으로 나와 화제가 됐다. 톰블리의 작업을 재조명하는 전시는 보스턴 미술관(Boston Museum of Fine Arts)에서도 함께 진행 중이다.
또 다른 메가 갤러리인 데이비드 즈워너(David Zwirner) 갤러리는 전후 시대의 미국과 이탈리아 작가 추상작품들을 ‘로마/뉴욕, 1954~1964’라는 제목으로 기획해 선보이고 있다. 1950~60년대에는 이탈리아 로마와 미국 뉴욕의 작가들 간 교류가 활발했다. 이 교류의 중심에는 이탈리아계 이민자 출신의 전설적인 아트 딜러인 레오 카스텔리가 있었다. 당시 카스텔리는 로버트 라우센버그, 윌렘 드 쿠닝, 사이 톰블리와 같은 추상회화의 거장들 전시를 뉴욕에서 연이어 열었다. 그는 이 작가들의 로마 방문을 추진했고, 이탈리아 작가들이 자신의 갤러리에서 전시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문화권의 차이를 극복하고, ‘미술'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기존 회화가 가졌던 개념과 물질적 한계를 함께 고민했다. 작가들이 다양한 재료를 실험하며 ‘회화'의 영역을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대표적으로 이탈리아의 알베르토 부리는 마대 자루와 기름을, 미국의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나뭇잎, 신문지, 나무와 같은 전통적이지 않은 재료들을 회화에 도입했다. 전시장에는 이 둘의 작업이 나란히 설치돼, 공간을 초월한 유대감을 살며시 드러낸다. 그 외에도 이탈리아의 앤디 워홀이라고 불리는 마리아 쉬파노(Mario Scifano), 피에로 도라지오(Piero Dorazio), 카를라 아카르디(Carla Accardi) 등과 같은 작가 작품들도 살펴볼 수 있다.
거장들의 추상회화들을 전시하는 메가 갤러리들과 달리 브루클린 뮤지엄(Brooklyn Museum)에서는 ‘브루클린 추상: 네 명의 작가, 네 개의 벽 (Brooklyn Abstraction: Four Artists, Four Walls)’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열고 있다. 호세 파를라(Jose Parla), 케네디 얀코(Kennedy Yanko), 레온 스미스(Leon Smith), 마야 하유크(Maya Hayuk)까지 참여 작가 넷 다 젊은 편이다. 네 작가 모두 ‘브루클린 추상’이라 불릴 만큼 브루클린 지역과 인연이 깊다.
이 중 파를라의 작품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파를라는 남미 쿠바계 이민자 출신으로 마이애미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의 최신 작업들은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했던 작가 자신의 경험과 관련있다. 3개월간 혼수상태에 빠졌을 만큼 위독했던 그는 병상에 누워있을 때 꿈 속에서 다양한 풍경들을 보았다고 한다. 무의식과 의식 사이를 오간 이미지들을 작가는 병상에서 회복하자마자 작품으로 시각화 했다. 인류 전체가 판데믹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았던 만큼 파를라가 겪었던 경험이 시각화된 추상 작품은 그저 한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의 경험을 대변한다. /글·사진(뉴욕)=엄태근 아트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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