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글로벌 70조 원 규모로 성장한 전력반도체에 대한 사업성 검토에 착수했다. 전력반도체는 전기자동차·신재생에너지 등 신기술 출현으로 세계가 주목하는 칩이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업황 둔화 속에 메모리 사업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신사업 발굴에 몰두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1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은 최근 사내에 '전력반도체 태스크포스(TF)'를 신설했다. DS 부문에서 칩 위탁 생산을 담당하는 파운드리, 반도체 회로 설계를 맡은 시스템LSI 등 각 사업부 임직원들이 차출됐다. 이들은 전력반도체 설계부터 생산 공정까지 사업 가능성을 다방면으로 검토하고 있다. 특히 실리콘카바이드(SiC)·질화갈륨(GaN) 등 업계에서 대세로 떠오른 ‘화합물’ 기반 전력반도체 구현 가능성을 분석하고 있다. 업계 일각에서는 2020년에 벌써 파운드리 라이벌인 대만 TSMC가 GaN 반도체 위탁 생산 사업을 시작한 만큼 삼성 파운드리와 연계한 사업을 중점적으로 들여다볼 것으로 관측했다.
차세대 전력반도체는 미래 먹거리 분야로 꼽힌다. 기존 실리콘 기반 반도체보다 크기는 1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면서도 10배 높은 전압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2차전지·자율주행 기술 등으로 전자장치 활용이 늘어나는 자동차 시장에서 각광받고 있다. 이에 현대자동차·테슬라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이 반도체를 선점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전력반도체 시장은 2019년 450억 달러(약 60조 원)에서 올해 18% 증가한 530억 달러(약 7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자의 전력반도체 TF 신설은 회사의 미래 먹거리 발굴 움직임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은 경기 변동에 예민한 메모리 사업의 매출 비중이 60~70%를 차지한다. 이는 2021년 4분기 9조 원에 가까웠던 삼성의 반도체 영업이익이 1년 뒤인 지난해 4분기 2700억 원으로 폭락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다. 업계에서는 매출 안정화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사업을 창출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이에 삼성전자가 메모리 불황기에 안정적인 사업 기반을 다질 수 있는 새로운 사업 구상에 나서는 것으로 해석된다.
◇차세대 먹거리 전력 반도체…“전기차용 칩 연간 70%씩 성장”
전력반도체는 전자기기 속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칩이다. 전자기기 속 배터리가 전력을 공급하고 배분할 때 생기는 손실을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스마트폰·가전제품 기능 고도화로 쓰임새가 늘어나는 추세다. 이런 와중에 전력반도체 업계에서 ‘게임 체인저’가 등장했다. 바로 자동차 분야다. 최근 2차전지를 활용한 전기차가 조명을 받으면서 자동차 안에서 전력을 제어하는 반도체의 역할이 덩달아 중요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 반도체의 유약한 내구성이 문제다. 반도체 주요 소재인 실리콘(Si)으로 만든 범용 전력반도체는 자동차가 뿜어내는 고압·고온·고주파를 버텨낼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만약 차량용 전력반도체가 극한의 환경에서 제대로 동작하지 않으면 탑승자의 생명에도 치명적이다.
이러한 실리콘 전력반도체의 약점을 극복한 칩이 실리콘카바이드(SiC)·질화갈륨(GaN), 즉 화합물 반도체다. 두 종류 이상의 원소를 결합해 새로운 웨이퍼를 만들어 그 위에 회로를 만드는 방식이다. 실리콘 반도체의 최대 동작 온도가 150도라면 SiC 반도체는 400도, GaN 반도체는 800도에서도 역할을 수행할 만큼 혁신적이다.
다만 화합물 반도체는 제조 방법이 까다롭고 구현이 어려워 가격이 비싸다. 업계에 따르면 SiC 웨이퍼 장당 단가는 1000달러 수준으로 실리콘 웨이퍼보다 10배 이상 높다. 또 현재까지 업계에서 만들 수 있는 100% GaN 기반 웨이퍼 크기는 2인치 수준이다. 양산이 가능한 6~8인치 웨이퍼 수준까지 도달하려면 최소 10년이 걸린다는 분석도 나온다. 현재까지는 수요에 비해 공급량이 지나치게 제한적이다.
주요 수요 업체인 완성차 업체들은 높은 단가 형성에도 화합물 전력반도체 확보에 공을 들이고 있다. 미국 테슬라의 경우 전체 전기차 판매량 중 SiC 반도체를 탑재한 자동차의 비중을 2018년 64%에서 2022년 99%까지 올렸다. 현대자동차도 아이오닉 제조에 SiC 반도체를 활용했고 제네시스 역시 이 칩을 채택했다.
신한투자증권 기업분석부는 “전기차용 SiC 전력반도체 시장 규모는 2021년 2조 원에서 연간 70% 이상 성장해 2025년이면 19조 원에 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삼성전자 외에도 세계 곳곳의 반도체 업체들은 시장 가능성을 보고 사업을 공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 분야에서의 강자는 스위스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미국 크리, 독일 인피니언이다. 미국 온세미는 경기 부천시에 2025년까지 1조 4000억 원을 투자해 SiC 전력반도체 연구개발(R&D)·제조 시설을 설립하며 이 시장에 공격적으로 진입하고 있다. 파운드리 세계 1위인 대만 TSMC도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와 손잡고 GaN 파운드리 사업을 시작했다.
국내 대기업 중에서는 SK그룹이 전력반도체 분야에 활발하게 투자하고 있다. SK㈜는 지난해 4월 1200억 원을 들여 예스파워테크닉스 지분 95.8%를 인수했다. 예스파워테크닉스는 국내 대기업들과 전력반도체 협업을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SK그룹 계열의 웨이퍼 업체 SK실트론은 2019년 미국 듀폰의 SiC 사업부를 인수해 현지에 SK실트론CSS라는 자회사를 설립했다. 지난해 12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 회사를 방문한 적도 있다. 토종 파운드리 기업 DB하이텍, 국내 팹리스 1위 업체 LX세미콘, 신생인 파워마스터 반도체 등도 전력반도체 R&D와 투자에 적극적이다.
삼성전자가 전력반도체 검토를 끝내고 사업을 본격화한다면 풍부한 자본과 생산 경험, 특유의 추진력을 토대로 재빠르게 시장 선점에 나설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삼성전자는 한편 전력반도체 TF 외에도 반도체 신사업을 발굴하기 위해 사내에 다양한 임시 조직을 꾸리는 분위기다. 지난해 경계현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 사장 직속으로 ‘어드밴스드 패키징 TF’를 만든 것이 대표적이다. 초미세 회로의 제조 한계로 첨단 후공정이 주목 받으면서 구성한 이 TF는 지난해 조직 개편을 통해 어드밴스드 패키지 팀으로 격상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달 17일 반도체 패키징 라인이 있는 천안·온양캠퍼스를 방문해 “어려운 상황이지만 인재 양성과 미래 기술 투자에 조금도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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