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들이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그 정신을 잊지 말고 계속 이어나가기를 바랍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걸음이 이어질 수 있도록 말이죠. 저는 이제 울타리 밖에서 뜨겁게 응원하겠습니다.”
최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N스튜디오에서 진행된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년 은퇴를 앞둔 국립심포니의 단원이자 바수니스트인 김건철(60) 씨가 음악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우여곡절이 가득했던 국립심포니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그가 바순을 연주하게 된 데는 가족의 영향이 컸다. 피아노를 전공해 음악 학원을 운영했던 어머니 덕분에 음악을 자주 접하게 됐고 외삼촌의 추천으로 바순의 길로 접어들었다. 1984년에는 명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한 베를린필하모닉 내한 공연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겪었다. “공연 휴게 시간에 무대 뒤를 찾아 베를린필 수석 선생님에게 ‘유학을 가고 싶다’고 말한 후 바순을 불었어요. 그러자 베를린으로 시험 보러 오라는 말을 들었어요.” 이후 시험에서 합격해 독일로 유학을 떠난 김 씨는 1996년 한국으로 돌아와 이듬해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국립심포니의 옛 명칭) 부수석 오디션에 합격했다.
20년이 넘게 코리안심포니와 함께하면서 많은 일을 겪기도 했다. 그는 입단 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터지고 당시 주요 후원자였던 쌍용의 지원이 끊기면서 당시 국립극장에 상주하던 코리안심포니가 재정난을 겪었던 일을 회상했다. “어느 날 1대 음악감독이던 홍연택 선생님이 월급 대신 매번 연주마다 수당을 줘야 할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홍 감독이 결연한 의지를 다지기 위해 만세 삼창을 외치자 단원들도 다 함께 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재정난으로 인해 코리안심포니를 그만둔 사람도 제법 있었다.
음악계의 노력이 이어진 끝에 결국 2000년 한국 최초의 민간 교향악단이었던 코리안심포니는 예술의전당 상주 단체가 됐고 이듬해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재단법인이 됐다. 지난해에는 국립 예술 단체의 역할 수행을 공고히 하고자 ‘국립심포니’로 명칭을 변경했다. 이에 대해 김 씨는 “1월 국립극장에서 신년음악회를 하면서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했다”면서 “예전에는 연습 장소가 없어 국립극장 로비에서 연습을 했는데 국립심포니가 된 후 처음 무대에 오른 첫 순간이 국립극장의 신년음악회였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은퇴 후의 그는 어떤 삶을 꿈꿀까. 김 씨는 지휘자로서의 삶을 꺼내 들었다. 그는 “대학교 3학년 때부터 40여 년간 교회 성가대 지휘를 하고 있고 유학 기간 따로 공부하기도 했다”면서 “일반적인 지휘 활동은 국립심포니를 하다 보니까 주말에도 공연이 많아 스케줄이 도저히 안 되더라. 은퇴하면 오케스트라에서의 수십 년 경험을 토대로 해서 아마추어나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지휘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고 설명했다.
두 달 후 은퇴를 앞둔 김 씨는 “앞으로도 좀 더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은퇴하게 돼 아쉽다”면서 “화려하고 돋보이는 악기는 아니지만 목관악기의 주춧돌을 맡고 있는 바순은 앞으로 은퇴하더라도 계속 같이할 오랜 친구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음악에 대해서도 “학생 시절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다니면서 튜닝 소리만 듣고도 설렜던 기억이 난다”면서 “아직까지도 싫증이 나지 않는 평생의 동반자”라고 칭했다.
김 씨의 마지막 국립심포니 정기 연주 공연은 4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차이콥스키 발레 모음곡’이다. “차이콥스키의 발레곡 ‘호두까기 인형’은 매년 국립발레단과 공연을 올려 지금까지 100회 이상 연주한 인연 깊은 곡이에요. 연말이면 연주하던 국립심포니의 ‘트레이드 마크’ 곡으로 마지막 정기 연주를 하게 돼 뜻이 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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