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간 힘의 균형을 깨뜨리는 정치적 판결이다.”
15일 대법원이 불법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경우 개별 행위의 정도를 따져야 한다는 결정을 내놓자 산업계에서는 일제히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뜩이나 회사의 영업과 생산라인을 볼모로 잡는 파업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현실성이 결여된 판결은 불법 파업만 조장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대법원은 노조 등의 불법 행위로 인한 배상 금액의 범위를 ‘인과관계가 있는 손해’로 한정했지만, 쟁의 가담자들의 책임 범위를 회사 측이 일일이 파악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불법 파업에 대한 기업의 손해배상 소송을 원천 봉쇄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일각에서는 이번 대법원의 판단이 이른바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의 입법 목적과도 맞닿아 있어 ‘정치적 판결’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이날 현대자동차가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차(005380) 비정규직지회 소속 조합원 4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노조의 의사 결정 및 실행 행위에 관여한 정도가 조합원마다 큰 차이가 있을 수 있어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 제한 정도도 △노조에서의 지위와 역할 △쟁의행위 참여 경위·정도 △손해 발생에 대한 기여 정도 등을 개별적으로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단이다. 또 쟁의행위의 정당성에 의심이 간다고 해도 다수결로 결정된 노조의 지시를 노조원이 불응하기 어렵다는 점 등을 고려하지 않고 노조와 개별 조합원의 손해배상 책임 범위를 동일하게 보는 것은 헌법상 근로자에게 보장된 단결권과 단체행동권을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이날 쌍용차가 전국금속노동조합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도 ‘금속노조가 회사에 33억 1140만 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는 원심을 일부 파기환송하고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금속노조가 불법 파업에 따른 손해를 배상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원심의 판단은 유지했지만, 2009년 12월께 파업 복귀자들에게 지급한 18억 8200만 원에 대해서는 “파업과 상당한 인과관계에 있는 손해라고 보기 어렵다”며 배상금 산정에서 제외하라고 판결했다. 사측이 제기하는 배상 금액의 가이드라인으로 ‘인과관계가 있는 손해’를 제시한 셈이다. 게다가 손해를 입었다는 점을 입증할 책임도 회사 측에 있다고 봤다.
이번 대법원의 판단은 노동자 등 약자를 고려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고용주와 같은 사측의 공장 점거 등 불법 파업 행위에 대한 ‘방어권’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평가가 나온다. 배상 책임은 물론 금액 산정까지 모든 판단의 부담을 회사 측에 안겼다. 불법 파업으로 대규모 손실을 입더라도 개별 노동자가 어느 정도 가담했는지, 또 피해 금액이 해당 행위와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는지 등을 밝히지 못하면 결국 회사 측은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아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대법원은 자동차 산업을 예로 들어 ‘불법행위로 매출 손실이 발생해도 향후 연장근로 등으로 손실을 메우면 손해액 산정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산업계는 이날 대법원의 판결에 강하게 반발했다. “노조와 개별 조합원에게 (불법 파업에 따른) 공동 책임은 묻지 말라는 의미”, “피해자가 입은 상처까지도 스스로 치료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과격 시위와 파업만 양산시킬 위험이 있다” 등 다소 거친 반응들이 쏟아져 나왔다. 추광호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산업본부장은 “불법 파업에 가담한 조합원별 책임 범위를 입증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기 때문에 결국 파업에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사용자가 떠안을 수밖에 없다”며 “불법 쟁의행위에 대한 사용자의 유일한 대응 수단인 손해배상 청구가 제한되는 결과를 야기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황용연 한국경영자총협회 노동정책본부장도 “이번 판결을 계기로 향후 산업 현장에서 유사한 불법행위들이 확대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이날 판단이 현재 입법 추진 중인 노란봉투법의 취지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대법원이 정치적 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노란봉투법에는 ‘법원은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경우 귀책 사유와 기여도에 따라 개별적으로 책임 범위를 정해야 한다’는 조항이 담겼다. 해당 판결이 기업의 과도한 손배소로부터 노조를 보호해야 한다는 노란봉투법의 입법 취지를 사실상 인정했다는 점에서 입법 과정상 찬반 논란 등 여야 간 충돌만 불러올 수 있다는 얘기다.
노동계에서는 이번 판결이 ‘노란봉투법’의 입법 논거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동안 기업이 노조에 대한 과도한 소송을 했다는 점이 입증됐다는 것이다. 한국노총은 이날 논평을 통해 “대법원은 개별 조합원에 대한 과도한 손배 책임이 헌법상 단결권과 단체행동권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며 환영했다.
다만 정부는 이같은 반응에 선을 그엇다. 고용부는 이날 입장문을 내고 “대법원의 판결은 노조와 조합원을 구분해 노조보다 조합원의 책임 비율을 낮게 정할 수 있다는 법리를 제시한 것”이라며 “불법행위자 개별로 손해액을 산정해야 한다는 노조법 개정안(노란봉투법)과는 관련이 없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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