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사상 첫 국가 양자기술 전략을 수립하고 민간과 함께 3조 원을 투자하기로 한 것은 양자기술이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의 핵심이자 미래 산업의 판도를 바꿀 ‘게임 체인저’라는 판단에서다. 현재 암호 체계를 무력화하는 양자컴퓨터와 해킹을 원천 차단하는 양자암호통신 같은 기술은 단순히 미래 먹거리 확보를 넘어 안보와도 직결되는 신기술로 평가받는다. 미국 등 선진국에 비해 양자기술 수준이 크게 뒤처진 만큼 대대적인 투자를 통해 격차를 좁히고 반도체 등 제조업과 산업 전반의 혁신을 이끌어낸다는 복안이다.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27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대한민국 양자과학기술전략’을 발표하고 “양자기술은 본격적인 산업화가 이뤄지지 않아 ‘골든타임’의 기회가 남아 있다”며 “총력전을 펼쳐 2035년 양자경제가 열리는 시점에서 우리나라가 선도국의 위치에 설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양자기술은 크게 양자컴퓨터·양자암호통신·양자센서가 3대 핵심으로 꼽힌다. 양자컴퓨터는 0과 1비트가 중첩된 큐빗 단위로 정보를 처리해 현존 슈퍼컴퓨터를 크게 능가하는 연산 성능을 자랑한다. 한국을 포함해 세계 각국 정부와 기업이 개발 중인 1000큐빗급이면 슈퍼컴퓨터를 뛰어넘고 발전이 계속되면 현재 암호 체계까지 모두 무력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양자암호통신은 도·감청 시 정보가 파괴돼 현재 방식의 해킹을 원천 차단한다. 양자센서는 기존 기기가 측정할 수 없는 미세한 자기장·온도·중력 변화까지 감지할 수 있어 반도체·배터리 설계와 결함 분석에 활용될 수 있다.
이에 글로벌 기술 패권 전쟁을 벌이는 미국과 중국을 포함한 주요국들은 앞다퉈 양자기술 확보에 나서고 있다. 양자기술 시장 규모는 지난해 8조 7000억 원에서 2030년 101조 2000억 원으로 연평균 36%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은 2018년 세계 최초의 양자법인 ‘국가양자이니셔티브(NQI)법’을 제정해 올해까지 최대 12억 달러(1조 6000억 원)를 투자하는 등 백악관 주도의 양자 연구개발(R&D) 집중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 2040년까지 전국 단위의 통합 양자통신망 구축도 추진 중이다. 중국은 2015년 ‘양자굴기’를 선언한 후 1000억 위안(18조 원) 규모의 세계 최대 ‘양자정보과학국가연구소’를 짓는 등 조(兆) 단위 투자를 이어오고 있다. 2016년 세계 최초의 양자통신위성 ‘묵자호’를 발사했고 2021년에는 2000㎞ 길이의 양자 유선망을 구축했다. 유럽연합(EU)은 10억 유로(1조 4000억 원) 규모의 ‘양자 플래그십’ 사업에 착수했고 일본은 2040년까지 ‘양자기술 혁신 전략 로드맵’을 추진한다.
우리 정부도 2035년까지 세계 4위 수준인 10%의 시장점유율 달성 목표를 세웠다. 이에 맞춰 현재 1000명에 불과한 양자 분야 종사 인력을 2035년까지 1만 명으로, 이 중 핵심 인력은 384명에서 2500명으로 늘린다. 현재 80개인 양자기술 기업 수를 1200개까지 육성하고 선진국 대비 기술 수준은 62.5%에서 85%로 높인다.
정부는 이를 위해 2조 4000억 원의 자체 예산과 민간 6000억 원을 합쳐 총 3조 원 이상의 예산으로 인재 양성과 R&D 지원에 나선다. 양자 학과·대학원, 미국·EU 등 해외 양자과학기술협력센터를 설치하는 한편 IBM·아이온큐 등과 손잡고 글로벌 기업 실습 등 고급 인재 교육도 지원한다. 인력 생태계를 바탕으로 2030년대 1000큐빗 양자컴퓨터, 100㎞ 거리의 양자통신망, 공공과 민간용 양자 파운드리 등 인프라를 구축하고 이에 맞는 양자 알고리즘, 소프트웨어, 양자컴퓨터에 의한 공격을 막는 양자내성암호 개발에도 나선다.
정부는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양자과학기술 및 산업 집중 육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양자 산업계의 스타트업 육성과 정책금융 지원, 정부·지방자치단체 공동 지원 ‘양자집중육성권역’ 조성, 국방 분야 양자 특화 연구센터 확대 등 제도적 뒷받침을 함께 추진할 방침이다. 이 장관은 “선도국에 비해 뒤처진 기술 수준을 신속히 향상시키기 위해 기술 로드맵에 따라 임무와 기한을 명확히 하는 ‘임무 지향적 연구개발’을 추진하겠다”며 “양자 핵심 인력 양성과 세계 최고 수준 반도체 역량을 적극 활용한 양자팹 구축 등을 통해 궁극적으로 민간 주도의 ‘양자 파운드리’ 시장을 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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