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 대전 승전국 중 하나인 소련은 과학 강국이었다. 소련에 흡수된 나치 독일의 과학·엔지니어들의 영향이 컸다. 미사일, 컴퓨터 등 기술력도 상당했다. 소련은 1957년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했고 세계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1961년)도 배출했다. 이 뿐 인가. 유리 오소킨이 집접회로를 만든 것도 1962년이다. 반도체가 군사력과 기술 패권을 좌우한다는 것을 알았던 소련은 젤레노그라드(Zelenograd·녹색도시)도 착공하면서 꿈의 반도체 도시 건설에도 한발 다가섰다.
그랬던 소련은 30년 뒤 반도체 패권 다툼에서 사실상 완패했음을 시인한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1990년 미국 실리콘밸리를 방문했고 미국의 첨단 기술을 넘겨 받고 싶어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평론가들은 미국의 완승을 확인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기술력에서 밀린다고 판단한 소련은 미국의 반도체 칩과 장비를 몰래 들여오고 베끼려고 했다. 하지만 간과한 게 있었다. 소련은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원자재 준비와 가공, 애칭, 도핑, 패키징에 필요한 2000개 안팎의 장치와 기계를 모두 갖췄다. 그럼에도 미국의 만든 반도체를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했다. 반도체 공정 하나하나에 들어가는 지식과 노하우, 미세한 디테일까지는 베낄 수 없었던 탓이다. 더욱이 무어의 법칙이 말하듯 마이크로칩에 저장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은 24개월마다 2배씩 늘었다. 반도체에 집적하는 트랜지스터의 수가 2배로 늘어난다는 것인데, 모방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는 ‘발전’의 속도였다. 소련이 온갖 수단을 모두 동원해 인텔의 칩을 따라 가려고 했지만 그 기술이 늘 5년 이상 뒤쳐진 것도 이런 이유다.
미국은 소련과의 반도체 격차를 유지하기 위해 치밀한 전략도 구사한다. 먼저 미국은 동맹국을 중심으로 한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했다. 반도체의 효율적인 분업 체계인데, 칩 설계와 제조장비, 조립의 역할을 이미 1960년대부터 나눴다. 단일 국가가 반도체 설계부터 장비·조립까지 모두 갖추는 것은 1대 100의 싸움과도 같았다. 투자의 규모는 물론 반도체 단계별 기술 발전의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미국은 첨단 반도체 기술에 대한 통제도 엄격하게 했다. 칩 스파이가 넘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구세대의 반도체 장비와 순도가 떨어진 재료로 칩을 생산할 수밖에 없었으니 미국과 소련의 기술 격차가 날이 갈수록 벌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미국은 30~40년을 이렇게 다투면서 소련을 ‘반도체’로 굴복 시켰다.
반도체 패권은 곧 군사패권의 보증수표였다. 미국은 소련 견제를 위해 일본에 반도체의 조립 공장부터 기술까지 이전한다. 하지만 그것이 부메랑이 돼 미국을 위협하는 데는 2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경제 대국으로서의 일본에 대한 공포감도 있었지만 미국 펜타곤을 자극한 것은 다른 데 있었다고 한다. 첨단 무기에는 첨단 반도체가 필요한데, 일본 칩 의존도가 높아지면 2차 세계 대전 이후 놓지 않고 있던 미국의 ‘군사패권’ 지위가 흔들릴 수 있었다. 심지어 일본은 2차 세계대전까지 일으켰던 국가다. 숨겨 놓은 야심이 컸다. 일본이 정치적 득실에 따라 그 첨단 칩을 소련에 제공할 가능성도 있다고 봤다. 소련이 첨단 반도체를 쥐면 미국으로 기울었던 군사력은 다시 비슷해진다는 얘기가 된다. 소련도 미국처럼 정밀 군사 무기로 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급기야 글로벌 질서는 또 체제 대립으로 갈 가능성도 커진다는 계산이 나왔다. 미 반도체 기업들의 아우성도 있었지만 미 정부는 1985년 미일 반도체협정, 1986년 플라자합의를 통해 일본의 기세를 아주 냉정하게 꺾어 버린 이유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1·2위를 석권하던 일본의 기업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삼성전자 등이 세계 반도체의 중심에 편입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다.
미국은 지금 세 번째 칩워(Chip-War)를 벌이고 있다. 상대는 중국이다. 중국은 1960년에 반도체연구기관을 출범 시키고 1965년엔 중국산 집적회로도 만들었다. 잭 킬비가 1958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에서 집적회로를 선보인 지 7년 후다. 중국은 소련·일본 못지 않게 강한 상대다. 미국은 결국 1·2차 칩워를 복기하듯 공급망부터 기술통제·초격차기술 등의 ‘승리’ 카드를 모두 꺼냈다. 누구 하나가 무릎 꿇을 때까지, 긴 싸움의 서막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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