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대 제후국이 패권을 다투던 중국 전국시대에 강대국인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있던 등나라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이러한 등나라의 처지를 두고 ‘간어제초(間於齊楚)’라는 사자성어가 생겼다. 한국 속담인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와 비슷한 맥락이다.
미국과 중국의 글로벌 패권 전쟁 속에 경제 규제가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시행 1주년을 맞은 미국의 반도체지원법(칩스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은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지만 이면에 중국 견제라는 목적이 있음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9일 인공지능(AI)과 반도체 등 첨단 기술 관련 자국 자본의 중국 유입을 제한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글로벌 공급망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미국의 규제 성벽이 점차 공고해지고 있는 것이다.
두 강대국의 싸움 속에서 한국의 등이 터질 가능성이 높게 예상됐다. 하지만 한국 기업은 스스로 볕 들 구멍을 찾아냈다. 비록 IRA 시행으로 북미 브랜드의 전기차가 보조금 혜택을 독식하게 됐지만 보조금 대상 차량의 상당수가 ‘K배터리’를 탑재하면서 국내 배터리 기업이 경쟁국을 압도하며 존재감을 뽐냈다. 경쟁국인 중국은 미국에 우회 진출을 하기 위해 한국 기업과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일찍이 북미 시장에 진출해 있던 한국 기업의 선구안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한순간도 안심할 수 없다. ‘프랑스판 IRA’와 핵심원자재법(CRMA) 등 중국산 전기차와 배터리를 견제하는 움직임이 유럽에도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규제들은 미국의 IRA처럼 중국을 겨냥해 발의된 것이지만 한국 기업에도 불똥이 튀게 된다. 8월 발효되는 유럽연합(EU)의 배터리법, 10월에 신고해야 하는 역외보조금 등 쏟아지는 유럽의 배터리 관련 규제로 한국 기업은 된서리를 맞을 위기에 처했다. 국가 간 규제 전쟁이 더욱 확대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지난해처럼 미국의 IRA 시행 이후 후속 대응에 진땀을 뺀 상황이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 고민하던 등나라의 임금은 맹자에게 그 방법을 물었다. 맹자는 “성벽을 높이 쌓은 후 연못을 깊게 파고 나라를 지키십시오”라고 답했다. 경제 대국들은 이미 자국 보호 정책이라는 방식으로 이를 실천하고 있다. 이웃 나라 일본의 경제산업성도 배터리와 반도체의 국내 생산량이 많을수록 기업 법인세를 줄여주는 세금 혜택을 주기로 했다.
반면 한국의 연구개발(R&D) 투자 세액공제와 시설 투자 및 생산에 대한 인센티브 제공은 경쟁국 대비 현저히 부족하다. 전기차와 배터리가 한 기업의 먹거리를 넘어 글로벌 공급망 전쟁의 칼자루가 된 지금 정부도 자국 산업을 위한 규제 혜택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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