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가 자국산 전기차에 대한 부품 국산화를 추진하는 배경에는 미국·유럽·일본 등에 대한 견제 의도가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전기차의 두뇌라고 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는 테슬라·퀄컴 등 미국 업체가 선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엔진 등을 제어하는 칩과 센서는 유럽의 인피니언·NXP 등이 강자로 꼽힌다. 여기에 전통적인 자동차 부품 시장에서는 보쉬(독일), 덴소(일본), ZF(독일) 등이 이미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전장 업계의 한 관계자는 17일 “최근 유럽연합(EU)이 중국산 전기차를 대상으로 반(反) 보조금 조사에 착수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전기차 부품 수입 제한 조치가 현실화할 경우 1차 타깃은 각종 갈등을 빚고 있는 미국과 유럽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삼성전자(005930)·LG전자(066570) 등 국내 업체들이 차량용 반도체와 전장 산업을 미래 먹거리로 일찌감치 점찍어두고 대대적인 투자에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과 미국·EU 연합군의 갈등 사이에서 국내 기업들이 애꿎은 피해를 볼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실제 삼성과 LG의 전자 계열사들은 반도체부터 디스플레이, 전기차 부품 등 전반적인 밸류체인에 걸쳐 전장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차량용 AP 및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사업에 매년 수조 원을 투입하고 있다. 차량용 시장이 메모리 반도체 사업에서 PC 시장을 넘어서는 3대 응용처로 떠오를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고부가 차량용 반도체 생산을 위해 2025년엔 4㎚(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2026년에는 2㎚ 등 초미세 공정 도입 계획도 확정했다. 삼성전기(009150)는 전기차용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생산량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LG 역시 LG디스플레이(패널), LG이노텍(카메라모듈), LG마그나(파워트레인), LG전자(OS·인포테인먼트시스템) 등 주력 사업에서 전장용 사업 보폭을 빠르게 넓히고 있다. 올해 상반기 LG전자의 사업 부문별 매출 비중에서 전장 사업을 담당하는 VS사업본부의 매출 비중은 처음으로 10%를 넘겼다.
이들의 주 무대는 주로 북미와 유럽 고객사지만 최근 들어 중국 전기차 시장과의 접점도 늘려왔다.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의 경우 지난달 중국 차량용 시스템온칩(SoC) 제조 업체인 세미드라이브와의 전략적 협업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전기차 부품 규제를 본격화하면 국내 업체들로서는 일차적인 매출 저하가 불가피하다. 시장조사 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산 전기차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30%에 달할 정도로 비중이 크다. 중국 비야디(BYD)·상하이자동차·지리자동차 등 글로벌 시장에서 판매량 5위 안에 드는 업체도 세 곳이나 포진해 있다.
완성차 업계에서도 우려가 제기된다. 기아는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인 중국 시장 공략을 위해 올 11월 준중형 전동화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모델인 EV5을 중국에 출시할 예정이다. EV5는 중국 현지에서 생산되는 첫 전용 전기차 모델이다. 내연기관 판매에서 고전 중인 현대차그룹은 기아의 EV5 출시를 반등의 모멘텀으로 삼을 계획이었지만 이번 조치로 최악의 경우 반도체 등 협력사들의 부품 공급망을 다시 확인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EV5의 배터리는 중국 회사 제품으로 큰 문제가 없지만 반도체의 경우 현지에 진출한 한국 협력사 제품일 경우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
전자 업계의 한 관계자는 “아직까지는 중국의 수입 제한 조치가 발동된 것은 아니지만 중국 현지 공장의 현지 생산 물량을 늘리는 방식 등을 고민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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