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010년 삼성의 신수종 5대 사업을 발표했다. 삼성의 에이스들이 2007년부터 신사업 발굴을 위한 태스크포스(TF)에 참여해 명단을 확정하기까지 약 3년의 시간이 걸렸다. 반도체의 뒤를 잇는 삼성의 먹을거리로 꼽히는 바이오와 배터리 등이 이때부터 집중 투자를 받은 사업들이다.
물론 모든 사업이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 태양전지·발광다이오드(LED)·의료기기 등 나머지 사업은 불과 10년도 안 돼 대부분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삼성의 실패를 책잡자는 게 아니다. 최고 두뇌들이 매달려도 실패할 가능성이 더 클 정도로 미래 예측이 대단히 어렵다는 뜻이다.
최근 재계에서는 “‘ABC’가 없는 보고서는 오너 책상에 오르지 못한다”는 말이 회자된다. 여기서 ABC는 회사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인공지능(AI)·배터리·바이오·자동차(전장·자율주행) 등을 뜻한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삼성처럼 ABC와 직접 연관이 있는 기업은 물론이고 석유화학·조선, 심지어 식품 기업들조차도 어떤 식으로든 ABC와 접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ABC라는 브랜드를 내세우지 않으면 시장과 투자자들로부터 외면받는 현실적 고민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쏠림 현상이다. 하물며 개미들도 분산투자를 하는데 대한민국 대기업들이 특정 방향으로만 달려가다가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날 경우 거센 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기후변화는 사기”라고 공공연히 이야기하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내년 선거에 승리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얀 석유’라고 불리는 리튬이 전 세계에서 무더기로 쏟아져나와 제조 기술력이 배터리 경쟁에서 별로 중요해지지 않는 미래도 상상해볼 수 있다. 미래의 만능열쇠로 여겨지는 AI조차 기업들이 실제 돈을 벌어들이기까지 몇 년이 더 걸릴지 예상하기 힘들다.
ABC에 대한 투자를 줄이자는 게 아니다. 이 산업들은 중간중간 속도가 느려질지언정 도도히 흘러나가 미래를 바꿀 것이라고 본다. 다만 이 정체기에도 막대한 투자를 이어나갈 수 있는 체력이 우리 기업에 있는지 제대로 된 분석을 할 필요가 있다.
ABC 외에 다른 분야에 거의 투자하지 못하는 우리 기업들의 한계도 되짚어봐야 한다. 삼성의 5대 신수종 사업은 “실패해도 좋다”는 이 회장의 결단이 있었기에 역설적으로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세계 최고 상속세 공포 때문에 경영권 승계를 이미 포기한 대기업 총수들이 30~40년 뒤까지 내다본 고위험 투자에 나설 수 있을까. 우리 사회가 이 질문에 답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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