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채무(중앙정부+지방정부 채무) 1134조 원 돌파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긴축재정을 천명했지만 경기 부진과 60조 원에 달하는 세수 펑크에 빚이 불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내년에만 30조 원에 육박하는 국채 이자를 비롯한 의무지출과 삭감이 불가능한 경직성 경비 등을 고려하면 재정 여력이 바닥일 수밖에 없다. 복지 과속과 국채 남발로 우리 정부가 경기 대응력을 소진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12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중앙정부 채무는 1097조 8000억 원(7월 기준)으로 이미 지난해 결산 채무(1033조 4000억 원)보다 빚이 64조 4000억 원 늘어났다. 지난해 말 기준 지방정부 채무 34조 2000억 원을 더하면 국가채무는 1132조 원인데 올해 말 나랏빚 예상치인 1134조 4000억 원까지 겨우 2조 원 남았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부채(D2) 비율은 2017년 40.1%에서 지난해 54.3%로 14.3%포인트 올랐는데 같은 기간 미국의 증가 폭이 15.2%포인트인 점을 고려하면 ‘돈을 찍어낼 수 있는’ 기축통화국인 미국만큼 나랏빚이 늘어난 셈이다.
정부의 이자 부담도 덩달아 커졌다. 올해 국채 이자는 24조 8000억 원이지만 내년 국채 이자는 28조 4000억 원으로 불어난다. 이마저도 낙관적인 전망이다. 고금리로 조달금리가 4%를 넘어설 경우 신규 국고채 증가분 이자가 3조 3700억 원, 국고채 잔액에 대한 이자가 30조 83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와중에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역점을 두고 있는 재정준칙법제화는 사실상 이번 국회에서 물 건너갔다는 평가가 대다수다. 추가경정예산 편성 등 지출 확대를 주장하는 야당의 반대가 큰 데다 여당에서도 내년 총선을 앞두고 돈풀기 패를 굳이 묶어두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안동현 서울대 교수는 “정부가 쓸 수 있는 카드가 없다시피하다”며 “경기 대응력이 잠식되는 것은 물론 재정 지속 가능성도 위험에 처했다”고 말했다.
‘써야 하는데 쓸 돈이 없다’…부채에 묶인 경제정책
자연스럽게 재정의 원래 역할인 경기 대응성은 뒷전으로 밀린다. 이론적으로 정부 재정은 경기가 안 좋을 때는 확장적, 경기가 좋을 때는 긴축적으로 운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정부 재정이 경기 둔화를 완화하고 과열된 경기를 가라앉히는 효과가 나타나 변동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의 재정 운용 방향은 이와 정반대다. 상대적으로 경기가 좋았던 최근 2년간 남는 돈을 나랏빚을 갚기보다는 ‘돈 풀기’에 집중 투하해버려 정작 불경기와 세수 부족이 예고되는 올해와 내년에 쓸 돈이 없는 상황이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조세정책연구원·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내년 국채 이자 상환 예산은 28조 4000억 원으로 올해 24조 8000억 원에서 3조 원 이상 불어난다. 여기에 연금·기초생활보장제도 등 줄일 수 없는 복지 지출을 합한 의무지출은 348조 2000억 원으로 내년 국세수입(367조 4000억 원) 대비 94.8%를 기록할 것으로 관측된다. 올해(85%)보다 10%포인트 가깝게 높은 수치로 이 비중이 90%를 넘은 것은 정부가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재정지출을 의무지출과 재량지출로 구분하기 시작한 2012년 이후 처음이다. 정부가 걷은 세금 전부를 의무지출로 뱉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조차도 낙관적인 전망이다. 정부의 국채 이자 상환 예상 금액은 국고채 평균 조달금리를 4%로 가정했다. 하지만 미국발(發) 고금리로 국내 채권금리도 빠르게 치솟고 있다. 올 6월 3.59%였던 국채 10년물 조달금리는 10월 들어 급상승하며 지난주 기준 4.240%까지 올랐다. 이대로면 내년도 국고채 이자 부담이 30조 원을 넘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올해뿐 아니라 내년도 한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마저 1%대로 진단하는 기관들이 속속 나타나는 가운데 경기 부양을 위한 정부의 마지막 패인 재정마저 묶인다는 의미다. 안동현 서울대 교수는 “재정이라는 것은 경기가 괜찮을 때 아껴쓰다가 지금처럼 안 좋을 때 쓰려고 모아두는 것인데, 전 정부의 방만 재정과 현 정부의 지나치게 빠른 감세가 묶여 정부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경제 규모 대비 과도한 부채는 △소비 위축 등 경제 악화 △실물경기 변동성 확대 요인 △대차대조표 불황 위험 확대 △신용등급 하향 조정 가능성 등 각종 부작용을 유발한다. 결국 정부가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는데 빚 때문에 재정 여력이 마뜩잖다는 굴레에 빠졌다. 최근 2년간 국세수입이 예상보다 119조 원 더 들어왔는데 추경으로 다 써버린 여파다.
더 큰 문제는 한국의 국가부채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재정 점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일반 정부 채무(D2) 비율은 54.3%였다. 처음으로 비기축통화 10개국 평균을 넘어섰다. IMF가 선진국으로 분류하는 전 세계 35개국 중 한국을 제외한 비기축통화 10개국의 지난해 말 기준 GDP 대비 D2 비율은 52.0%로 한국보다 낮다. 이들 국가가 코로나19 이후 재정 건전화에 나서며 국가채무비율을 55.6%(2021년)에서 52.0%(2022년)로 낮추는 동안 한국은 51.3%에서 3%포인트 높였다. 이 추세가 꺾이지 않으면 2028년의 한국 GDP 대비 D2 비율은 58.2%로 9.5%포인트 높아진다. 상승 폭이 OECD 37개국 중 1위다.
이조차 빙산의 일각이라는 지적도 있다. 빠르게 늘어나는 공기업·공공기관 채무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고유가에 탈원전 정책이 이어지며 한국전력의 부채는 올해 상반기까지 200조 원을 넘어섰다. 한국가스공사 역시 52조 원이 넘는 부채가 쌓였다. 영업적자를 공사채 발행으로 때우는 상황인데 사채 발행 한도 소진이 임박할 정도로 찍어내는 상황이다. 이들 공사채는 정부가 지급을 보증하는 만큼 국가부채(공공 부문 부채·D3)의 일종이다. 재정 건전성을 강조하는 한국 정부가 부실한 공기업을 끌어안고 있다는 것 자체가 국제신용평가사들의 평가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이강구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정부 정책에 필요한 자금을 공기업이 동원하는 만큼 이들 부채도 정부 부채로 봐야 하는데 상세한 파악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결국 과감한 재정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돈 풀기 요구부터 차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안 교수는 “총선을 앞두고 쪽지 예산이 기승을 부릴 가능성이 높다”며 “이 같은 선심성 예산을 막고 세세하고 강도 높은 실사를 통해 새는 세금을 잡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와중에 ‘돈 풀자’는 법안만 발의하는 국회
매년 국가 재원을 투입해야 하는 법안이 늘어나면서 정부의 재정 부담도 커지고 있다. 나랏빚이 1100조 원에 육박한 가운데 내년 총선을 앞둔 정치권의 포퓰리즘 입법은 기승을 부릴 것으로 전망된다. 입법부의 과도한 재정지출을 막기 위한 통제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지난해 국회 문턱을 넘은 법안으로 올해부터 2027년까지 5년간 늘어나는 재정 부담은 총 91조 7635억 원으로 집계됐다. 예정처가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재정 소요 법률 154건 중 실제 나랏돈이 얼마나 들어갈지 계량화가 가능한 110건을 분석한 결과다. 국가 재원이 필요한 법률 44건이 제외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향후 재정 부담은 집계치보다 커질 수 있다.
재정 부담은 대부분 감세 정책에 기인했다. 우선 예정처는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법안으로 정부 수입이 연평균 16조 3994억 원 줄어들 것으로 분석했다. 지난해 제·개정된 법률만으로 세수가 향후 5년간 82조 원 가까이 쪼그라든다는 의미다. 지난해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에 따른 세수 감소액 추정치만 41조 1755억 원이다. 이 밖에도 법인세법과 소득세법 개정으로 각각 20조 5815억 원, 13조 4960억 원 규모의 세수가 줄어들 것으로 전망됐다. 예정처는 “2022년 가결 법률에 따른 수입(세수) 감소는 예년보다 큰 편일 것”이라고 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치권에서는 대규모 재정 투입이 불가피한 입법이 잇따르고 있다. 여야 간 ‘빅딜’로 올 상반기 동시에 국회 문턱을 넘은 대구·경북(TK) 신공항 특별법과 광주 군 공항 이전 특별법이 대표적이다. 해당 특별법으로 추진될 사업은 20조 원 규모다. 올해는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만큼 재정 소요 법률에 따른 부담이 지난해보다 클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재정준칙은 물론 별도의 통제장치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특히 나랏빚이 일정 수준을 넘지 않도록 관리하는 재정준칙 법제화만으로는 의무지출 증가세를 막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재정준칙은 국회에 대한 견제 장치로 작동하기에 한계가 있다”며 “효과가 입증되지 않은 재정지출이 양산될 경우 입법으로 조정하는 절차 등 여러 통제 수단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