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이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규제를 내년 6월까지 현 수준으로 유지하기로 했다. 은행채 발행도 은행의 여건에 따라 조절할 수 있도록 했다. 고금리 정기예금의 만기가 돌아오면서 수신 경쟁이 과열되자 은행의 현금 확보 부담을 덜어준 것이다.
금융위원회는 18일 김소영 금융위 부위원장 주재로 ‘금융시장 현안 점검·소통회의’를 개최했다고 밝혔다. 이날 회의에는 금융감독원과 주요 금융협회가 참석해 금융시장 상황과 위험요인, 대응방안을 논의했다.
당국은 우선 LCR 규제를 현 95% 수준으로 내년 6월까지 유지하기로 했다. LCR은 은행이 보유한 고유동성 자산을 30일간 예상되는 순 현금 유출액으로 나눈 몫이다.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급격한 현금 유출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평가하는 지표로 비율이 높아질수록 은행은 예금을 비롯한 유동성 자산을 더 늘려야 한다. 당국은 LCR을 코로나19 사태 당시 85%까지 낮췄으나 이후 단계적으로 비율을 높이기로 했는데 당분간 현 수준을 유지하면서 은행의 자금 조달 부담을 줄여주기로 한 것이다. 금융위는 “2024년 7월부터 단계적 인상을 원칙으로 하되 최종 결정은 2024년 2분기 중 시장 상황을 보아가며 결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당국은 은행이 각사 여건에 따라 은행채를 발행하도록 허용하기로 했다. 당국은 은행채 발행한도를 3분기까지 만기가 된 물량의 125%로 묶어뒀으나 4분기부터는 이를 풀기로 한 것이다. 은행은 자금을 조달하려면 은행채를 발행하거나 예금을 늘려야 하는데 은행채 발행이 자유로워지면 예금을 받을 필요성이 전보다 떨어진다. 다만 초우량채인 은행채 발행이 늘면 상대적으로 신용등급이 낮은 회사채 시장이 쪼그라들 수 있는 만큼 당국은 시장 상황에 따라 발행 규모와 시기를 탄력적으로 조절하기로 했다.
당국이 규제 문턱을 낮춘 것은 최근 들어 은행권 수신 경쟁이 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레고랜드 사태로 시중에 자금이 마르자 은행권은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연 4~5% 금리의 1년 만기 특판 예적금을 내놨는데 이달부터 만기가 돌아오자 예금주를 붙잡기 위해 경쟁이 벌어진 것이다. 금융권에 따르면 작년 4분기에 늘어난 수신 규모는 100조 원 정도로 추산된다.
실제 올 들어 정기예금 금리를 연 3%대로 유지해 오던 주요 시중은행들은 이달 들어 연 4%대로 금리를 높이고 있다. 이날 은행연합회 공시에 따르면 신한은행의 ‘쏠편한 정기예금’과 우리은행의 ‘WON플러스예금’의 최고금리는 각각 연 4.05%를 기록했다. KB국민은행의 ‘KB Star 정기예금’과 하나은행 ‘하나의 정기예금’도 연 4%의 최고금리를 제공한다.
문제는 시중은행간 경쟁이 과열될수록 은행권으로 예금이 쏠려 제 2금융권의 자금난이 커질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 새마을금고와 신협은 이달 연 5%대 금리를 내거는 등 급격한 자금 이탈을 막기 위해 고금리 상품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수신 경쟁 여파로 은행의 조달 비용이 늘고 이에 맞물려 대출금리가 더 뛸 수 있다는 점도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은행채 발행 한도를 아예 없애면 은행의 자금 조달 창구가 트이는 만큼 수신 경쟁이 잦아들 것이라는 게 당국의 판단이다. 이와 함께 LCR 규제를 완화해 은행의 자금 수요 자체를 줄여둔 만큼 은행채 발행 물량이 조절돼 회사채 구축 효과도 크지 않을 것으로 당국은 보고 있다. 김 부위원장은 “시장 전체적으로 금리 경쟁 행위가 지나치게 확산될 경우 자금 불균형에 따른 유동성 문제 심화 등 부정적 파급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면서 “과도한 자금 확보 경쟁 방지를 위해 추진하는 규제 유연화 조치들이 금융회사의 자산 외형확대 경쟁의 수단으로 활용돼선 안 될 것”이라고 밝혔다.
금융위는 이날 회의에서 퇴직연금(DB형)의 연말 납입 집중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금융권과 공공기관, 대기업의 부담금 분납과 만기 다변화를 유도하기로 했다. 공정경쟁을 위한 금리공시체계 정비 등을 내용으로 하는 '퇴직연금 감독규정' 개정도 조속히 마무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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