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들이 정권 교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보험성’으로 영입했던 사외이사들이 최근 정부 요직에 속속 배치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금융투자 업계 안팎에서는 사외이사가 고액 연봉만 받고 사실상 ‘거수기’ 노릇을 하면서 권력과 연결고리 역할에만 치중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10일 업계에 따르면 미래에셋증권(006800)은 사외이사인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가 지난달 31일 일신 상의 사유로 자진 사임했다고 2일 공시했다. 일신상의 사유란 성 교수가 같은 달 28일 대통령실 정책실장에 임명된 일을 뜻했다. 앞서 미래에셋증권은 대선 직후인 2022년 3월 성 실장을 사외이사로 영입한 바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 KT 사외이사를 지낸 성 실장은 경영진에게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 의견을 내다가 그 해 연임에 실패한 바 있다.
미래에셋증권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이 증권사는 2022년 성 실장이 포함된 감사위원회 소속 사외이사 3명과 그 외 사외이사 1명에게 각각 6400만 원을 지급했다. 업계에서는 미래에셋증권이 2021년에는 감사위원회 소속 위원 3명에게 6300만 원씩, 그 외 사외이사 1명에게 5800만 원을 지급한 점을 감안해 지난해에는 성 실장에게 더 높은 보수를 줬을 것으로 추정했다. 업계 일각에서 미래에셋증권의 성 실장 영입이 결과적으로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의 ‘신의 한 수’가 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최근 증권사 사외이사 출신으로 요직을 꿰찬 인사는 성 실장뿐이 아니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대통령실 경제수석이 되기 직전인 2020년 3월~ 2022년 3월 신한투자증권 사외이사로 일하며 1억 원이 넘는 급여를 받았다. 그는 2019년 3월부터 2022년 3월까지 일동홀딩스 사외이사도 지내며 1억 800만 원을 추가로 받은 바 있다. 최 부총리의 이 같은 행보는 그가 2021년 저서를 통해 “국내 사외이사에 관료 출신이 많아 다양성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부분과 상충한다며 인사 검증 과정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최 부총리가 신한증권 사외이사로 선임될 당시 증권사 수장은 김병철 전 대표에서 이영창 전 대표로 교체되는 시점이었다. 증권사 인사까지 총괄한 당시 신한금융지주 회장은 조용병 현 은행연합회 회장이다. 조 회장은 2017년부터 지난해 3월까지 지주 회장을 연임한 뒤 같은 해 12월 은행연합회 회장에 올랐다.
이순호 한국예탁결제원 사장은 2022년 3월부터 NH투자증권(005940)의 모기업인 NH농협금융의 사외이사를 지냈다. 이 때문에 선임 때부터 예탁원과 NH투자증권 간 옵티머스펀드 관련 손해배상 구상권 청구 소송 관련 이해상충을 유발할 수 있다는 지적이 일기도 했다. 이 사장은 논란이 불거지자 지난해 2월 NH농협금융 사외이사에서 과감히 물러났다.
증권사들이 여야를 아우르며 정권과 인연이 있는 인물들을 사외이사로 영입하는 것은 금융투자업 자체가 정부가 주도하는 제도와 규제에 극도로 민감한 업종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부가 들어서든 윗선과 이른바 ‘끈’이 있는 인사들을 확보해 놓아야 최소한 피해는 보지 않는다는 인식이 작용하는 셈이다. 여기에 다음 취업 자리를 고려하는 업계 최고경영자(CEO)들의 이해 관계와도 맞닿아 있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삼성증권(016360)은 문재인 정부에서 특허청장과 마지막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낸 박원주 전 수석을 지난해 말 사외이사로 영입했다. 전남 영암 출신으로 광주 송원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박 전 수석은 민주당 정부가 다시 들어설 경우 중용될 가능성이 상당한 인물 중 하나다. 삼성증권은 2022년 기준으로 감사위원회 소속 사외이사 3명에게는 7000만 원씩, 그 외 사외이사 1명에게는 9500만 원을 지급했다.
업계의 한 핵심관계자는 “사외이사로 활동하던 사람이 대통령실 소속 인사나 정부 장·차관이 되면 민원을 논의하기에 수월해지는 측면이 있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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