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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잃은 증권사…채권형 신탁·랩서 90조 증발

'채권 돌려막기로 수익률 보전'에

금감원 조사이후 자금 급속이탈

1년반새 잔액 40% 가까이 빠져

서울 여의도 증권가 전경. 연합뉴스




금융 당국이 이른바 ‘채권 돌려막기’ 관행에 철퇴를 가하자 증권사들의 일임형 랩어카운트와 채권형 특정 금전 신탁 잔액이 1년 반 사이 90조 원 넘게 증발했다. 일부 증권사들이 불법적으로 수익률을 보전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법인 고객의 신뢰를 크게 잃은 결과로 분석된다.

15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증권사 일임형 랩어카운트 잔액은 지난해 11월 말 93조 9386억 원을 기록해 역대 최대치였던 지난 2022년 5월 말 153조 7614억 원보다 38.9%(59조 8228억 원) 급감했다. 증권사 채권형 특정 금전 신탁 잔액도 같은 기간 83조 3200억 원에서 52조 9769억 원으로 36.42%(30조 3431억 원) 줄었다. 랩과 채권형 특정 금전 신탁 두 상품에서만 1년 반 사이 90조 1659억 원이 증발한 셈이다.

랩과 신탁 상품 대부분은 법인이 단기 자금을 굴리는 용도로 쓰인다. 랩은 채권·주식·유가 선물 등에 투자하는 자산관리(WM) 서비스다. 증권사가 랩 상품으로 투자하는 자산의 80%가량은 채권이다. 운용 현황을 실시간으로 조회할 수 있는 데다 자금을 일임한 운용역에게 일부 운용 지시도 내릴 수 있어 변동성이 높은 시장에 적합한 상품으로 꼽힌다. 신탁은 투자자가 채권·예금·주식 등 운용 상품군을 정하면 증권사는 그 안에서 차별적인 운용 전략을 펼친다.

증권사 랩과 신탁 상품에서 자금이 유출된 것은 최근 금융감독원이 채권 돌려막기 의혹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검사하고 제재를 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문제가 있는 상품이라는 인식이 법인 투자자들 사이에 퍼지면서 단기 자금 운용 상품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는 평가다.





실제로 증권사 랩에서는 금감원의 검사·제재 소식이 알려진 지난해 5월부터 11월까지 7개월 연속으로 자금이 빠졌다. 이 기간 자금 유출 규모만 총 18조 7090억 원에 달했다. 채권형 신탁에서도 같은 기간 10조 5634억 원의 자금이 흘러나갔다.

앞서 금감원은 2022년 말부터 증권사들이 관련 상품으로 잘못된 채권 거래를 하지 않았는지 실태 조사에 들어갔다. 2022년 6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대폭적인 금리 인상 기조로 채권 가격이 급락하면서 증권사들이 수익률을 유지하기 위한 ‘꼼수’를 썼다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2022년 9월 이른바 ‘레고랜드 사태’가 벌어지고 단기 자금 시장이 빠르게 냉각되면서 랩 수익률이 급감한 점도 조사 돌입의 근거가 됐다. 금투협에 따르면 2022년 12월 7일 ‘A1’ 등급 기업어음(CP) 91일물 금리는 역대 최고치인 5.54%까지 치솟았다.

금감원은 이후 지난해 12월 17일 9개 증권사가 주요 고객 손실을 메우기 위해 다른 고객 계좌로 손실 난 채권을 넘기는 자전거래를 벌이거나 자사 자산으로 손실을 보전했다고 발표했다. 금감원은 이들 증권사 운용역 30명을 검찰에 넘겼다. 업무상 배임 등의 혐의에 대해서는 제재심의위원회 절차에 착수했다.

금융투자 업계에서는 랩과 채권형 신탁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만큼 당분간은 관련 잔액이 반등하기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자산운용사의 한 관계자는 “법인 특성 상 수익률 못지 않게 중요한 요인은 신뢰인데 이를 단기간에 회복하기는 어렵다”며 “금융 당국 제재가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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