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 예탁금이 정부가 이달 국내 증시 전반을 부양할 목적으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도입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3조 원 가까이 증가했다. 금융투자 업계에서는 설 연휴 직후 프로그램의 방향이 구체화될 경우 개인투자자들이 증시 변동성이 커진 틈을 타 정책 수혜 종목이나 성장주를 선별 매수하는 데 자금을 쓸 것으로 예상했다.
8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이달 6일 투자자예탁금은 하루 동안 2조 542억 원이나 증가해 52조 8949억 원으로 수직 상승했다. 이는 지난달 4일(54조 2492억 원) 이후 최대치이자 정부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도입을 시사한 같은 달 24일(49조 7804억 원)보다 3조 1145억 원이나 많은 수치다. 예탁금은 7일 51조 6621억 원으로 다소 줄었으나 여전히 1월 24일보다는 2조 원 정도 많은 수준을 유지했다.
예탁금은 투자자가 주식을 사려고 증권사 계좌에 맡겨두거나 주식을 팔고 쌓아둔 증시 대기성 자금이다. 예탁금은 지난해 12월 산타 랠리(크리스마스를 전후로 주가 지수가 상승하는 현상)를 틈 탄 차익 실현 물량과 대주주 양도소득세 대상을 회피하려는 자금이 증시에서 일시적으로 빠지면서 1월 2일 하루에만 7조 원 가까이 증가해 59조 4949억 원으로 불어난 바 있다. 이른바 ‘1월 효과(1월 주가가 다른 달보다 강세를 보이는 현상)’를 기대하고 새로 유입된 개인 자금도 있었다.
그러다 올 들어 대북 리스크, 글로벌 자본의 미국·일본·인도 증시 쏠림 현상 등으로 코스피지수가 부진한 흐름을 보이자 곧장 50조 원 안팎까지 규모가 줄고 제자리걸음만 걸었다. 연초부터 중동 정세가 불안해진 데다 글로벌 금리 인상 시기가 2분기 이후로 미뤄진 점도 개인투자자들이 주식 매수 대기를 망설이게 한 요인이 됐다.
업계에서는 정부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도입 의지가 예탁금 증가 추세에 영향을 줬다고 해석했다. 자동차·은행·보험·증권·유통·철강주와 지주사 등 주가순자산비율(PBR)이 낮은 업종에 기관과 외국인 매수세가 집중돼 증시가 활기를 찾으면서 차익 실현과 저가 매수 전략을 구사할 여지가 늘었다는 점에서다. 실제 개인들은 1월 24일 정부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발표 이후 이날까지 코스피는 6조 7000억 원어치 이상을 내다팔고 코스닥은 1조 5000억 원어치 이상 순매수했다. 이달 2일에는 유가증권시장에서 하루 동안만 2조 4896억 원어치를 팔아치워 국내 증시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개인들이 이전까지 주가가 상승하지 못했던 저PBR주를 내다 판 돈으로 고PBR 중소형 성장주를 사거나 예탁금 형태로 남겨두고 있다는 뜻이다. 개인은 이 기간 현대차(005380)를 1조 7409억 원어치나 팔아치운 것을 비롯해 기아(000270)(6129억 원), 삼성물산(028260)(4516억 원), KB금융(105560)(3450억 원), 하나금융지주(086790)(2642억 원) 등 대표적인 저PBR주를 대거 처분했다. 대신 네이버(NAVER(035420)·2929억 원), SK하이닉스(000660)(928억 원), 두산로보틱스(836억 원) 등 기술주를 적극 매집했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이달 정부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발표 때까지 당분간 저PBR 위주의 장세가 이어질 것으로 보고 개인들도 증가된 예탁금을 기반으로 수혜 종목이나 소외 종목 매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조창민 유안타증권(003470) 연구원은 “저PBR주의 상승이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며 “관련 종목 가운데 우량주를 선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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