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이 전체 계열사 임원들을 대상으로 주6일제 근무를 전격 시행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이스라엘·이란 전쟁 가능성 등 전 세계적으로 경영 불확실성이 확대되자 삼성 계열사들이 자발적으로 ‘비상경영’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17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 모든 계열사 임원들은 이르면 이번 주말부터 주 6일 근무를 하기로 결정했다.
계열사별로 보면 삼성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는 지원 및 개발부서 임원들을 중심으로 절반가량의 임원들이 이미 주 6일 근무를 하고 있었으나 앞으로는 나머지 임원들도 동참한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의 1분기 실적이 비교적 양호하게 나오기는 했지만 내부에서는 진짜 위기는 지금부터라는 우려가 더 크다”며 “이 같은 위기의식에 공감한 다른 임원들도 주 6일제에 나서기로 최근 결정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외에 삼성전기·삼성SDI·삼성SDS·삼성디스플레이 등 전자 관계사 임원들도 이르면 이번 주부터 주 6일 근무에 들어간다. 삼성물산과 삼성중공업·삼성E&A 등 설계·조달·시공(EPC) 3사 임원들은 이미 올해 초부터 주 6일 근무를 시행하고 있었다. 삼성생명 등 금융 계열사들 역시 조만간 주 6일제 선언에 동참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근무 방식은 임원들의 사정에 따라 토요일 또는 일요일 중 하루를 골라 근무하는 방식이 유력하다. 다만 삼성전자 임원들이 대부분 토요일 근무를 선택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수 임원들이 토요일 근무를 할 가능성이 높다.
임원 출근에 따른 부하 직원들의 ‘동반 출근’은 엄격히 금지된다. 직원들이 임원들의 ‘근무를 위한 근무’를 해봐야 오히려 업무 효율에 방해가 된다는 판단에서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재계 1위 삼성이 본격적으로 비상경영에 나서면서 다른 대기업들도 동참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최악 경영환경에 노조까지…"작은 실기가 일류삼성 흔들 수도"
삼성그룹 계열 임원들이 주 6일제 근무를 결정한 배경에는 그만큼 삼성을 둘러싼 경영 여건이 불확실하다는 위기감이 있다. 실제 이스라엘 전쟁이 이란과의 전면전으로 확전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경기와 물가에 민감한 영향을 끼치는 환율과 유가가 들썩이고 있다. 여기에 더해 미중 갈등의 강도 역시 점점 거세지고 있고 올해 미국 대선 결과 역시 우리 기업들이 그려놓은 장기 플랜을 완전히 뒤집을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기업 외부에 너무 큰 변수들이 산재해 기업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것인데 “작은 실기에도 일류삼성은 끝날 수 있는 형국”이라고 평가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삼성전자 노조의 공세 역시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삼성전자 최대 노조인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은 17일 삼성전자 경기 화성사업장 부품연구동(DSR) 앞에서 노조 추산 2000여 명의 노조원이 집결한 가운데 문화 행사를 개최했다. 사측이 5.1%의 임금 인상을 제시하자 노조는 6.5%를 요구하면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전삼노는 이미 합법적으로 파업에 돌입할 수 있는 쟁의권도 확보한 상태다.
반도체 장비 업체의 한 관계자는 “일반 제조 업체와 달리 반도체 라인은 생산이 한 번 멈추면 다시 조업을 재개할 때까지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며 “삼성이 안팎에서 최대 위기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대내외 리스크를 제외하고 보더라도 삼성전자 실적은 결코 낙관하기 어렵다. 특히 삼성전자 연간 영업이익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반도체(DS) 부문의 경우 4분기 내내 적자를 기록했다. 올 1분기 시장 회복세로 흑자 전환에는 성공했지만 대외 불확실성으로 생산능력을 100% 가동하기 힘든 실정이다.
게다가 기술 격차까지 좁혀지고 있다. 지난해 인공지능(AI) 시장 성장으로 각광받았던 고대역폭메모리(HBM)는 SK하이닉스에 1위 자리를 내주면서 자존심을 구겼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독보적 1위를 달렸던 범용 D램 분야에서도 SK하이닉스와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삼성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악화일로의 상황이 이어지면서 삼성전자 임원들은 올해 초 연봉을 동결하겠다는 특단의 대책까지 꺼내기도 했으나 경영 정상화까지 갈 길이 멀다는 게 내부 분위기다.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반도체 수요 부족이라는 업황을 탓하기보다는 임원들 먼저 정신 재무장을 통해 올해 반드시 위기 극복을 해내자는 결의의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주력 제품인 스마트폰의 시장 환경도 쉽지 않다. 시장조사 업체 IDC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스마트폰 시장 출하량은 11억 7000만 대로 전년 대비 3.2% 줄어들었다. 글로벌 경기 침체에 영향을 받아 10년 만에 가장 낮은 출하량을 기록한 것이다. IDC 측은 “지난 3분기 연속 출하량이 늘어났지만 아직 스마트폰 시장 침체가 해소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나마 올 1분기에는 세계 최초 인공지능(AI) 스마트폰인 갤럭시 S24 판매 돌풍 속에 애플에 내줬던 1위 자리를 탈환했지만 화웨이 등 라이벌 회사들의 약진으로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해지고 있다. 가전·TV 사업 역시 지난해 4분기 적자를 기록하는 등 어려운 경영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 이외 계열사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삼성전기는 지난해 매출액이 8조 9094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5.5% 감소하고 영업이익은 6394억 원으로 무려 45.9%나 줄었다. 삼성 주력 사업 중 하나인 배터리 사업을 주도하는 삼성SDI는 외형 성장에 성공은 했지만 수익성은 후퇴했다. 삼성SDI는 지난해 전년 동기 대비 12.8% 늘어난 22조 7083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며 사상 최대 매출 실적을 냈지만 원자재 가격 하락 및 일부 제품 재고 증가에 따라 연간 영업이익은 1조 6334억 원으로 전년 대비 9.7% 감소했다. 삼성그룹의 모든 계열사가 사실상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셈이다.
정보기술(IT) 제품 수요에 영향을 미치는 거시경제 역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금리 인하 시기를 늦출 수 있다는 매파 성향(통화 긴축 선호) 발언을 하면서 뉴욕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이 한때 154.79엔까지 올랐다. 달러 대비 엔화 가치는 34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덩달아 원화의 약세도 심각하다. 원·달러 환율이 장중이지만 1400원을 돌파할 정도로 좋지 않다. 고물가·고금리 피로감이 누적된 상황에서 환율까지 급등하면서 한국 경제가 움츠리는 모습이다. 급기야 외환 당국은 이례적으로 연이틀 구두 개입에 나서며 환율 진정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중동 불안 등의 여파로 쉽게 진정시키기 어려운 국면이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솔직히 지금의 위기 국면은 1997년 환란 이후 가장 큰 상황으로 전개될 수도 있을 정도”라면서 “대기업들이 올해 경영전략을 다시 짜야 할 정도”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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