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밸류업 공시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밸류업 공시 가이드라인에 따른 공시 대상에는 이른바 ‘쪼개기 상장’ 등 비재무제표 관련 내용도 포함됐는데, 이는 정부가 기업 지배구조 문제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주요 요인 중 하나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금융위원회와 한국거래소·자본시장연구원 등 유관 기관은 2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기업 밸류업 지원방안 2차 세미나'를 열고 기업가치 제고 계획 가이드라인과 해설서 초안을 공개했다. 기업 스스로가 가치를 높일 수 있는 핵심 지표를 선정해 중장기적인 목표와 함께 계획을 세우고 이를 이행하는 과정까지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한 것이다. 공시 참여 여부는 물론 어떤 내용을 담을지도 모두 자율에 맡겼다.
정부는 재무 정보뿐 아니라 지배구조 등 비재무지표까지 공시 대상에 포함시켰다. 상장기업의 물적 분할 이후 쪼개기 상장 등 지배구조 이슈로 일반 주주의 권익 침해가 발생했다면 이를 충분히 설명하라는 것이다. 특히 정부는 2004년 설립해 2010년 나스닥에 상장했으나 2020년까지 이익을 내지 못했던 테슬라를 밸류업의 모범 사례로 들었다. 기업 스스로 비전을 제시하면서 투자자들을 설득해 투자를 이끌어냈고, 결국 가치를 높였다는 것이다.
정부는 해외 투자자들도 밸류업에 관심이 많다며 성공을 자신하고 있다. 실제 올 들어 4월까지 외국인의 국내 증시 누적 순매수 자금은 19조 원에 육박해 역대 최대를 기록하고 있다. 김소영 금융위 부위원장은 “이번 가이드라인은 끝이 아닌 시작”이라며 “상장기업들이 진정한 내재가치 또는 기대가치를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이달 중 가이드라인을 확정해 준비되는 기업부터 공시하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밸류업지수 개발과 이와 연계돤 상장지수펀드(ETF) 상장도 연내 추진한다. 다만 관심을 모았던 세제 지원 등의 방안은 이번에 포함되지 않아 시장에서는 실망감도 감지된다. 페널티와 인센티브가 명확해야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발표가 미흡한 점이 있음에도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첫 단추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이준서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부동산을 통해 성장률을 높이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향후 국민경제 전체의 긍정적인 효과를 위해서도 금융시장으로의 본격적인 머니 무브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비재무지표도 공시…쪼개기 상장땐 모회사 주주보호책 내놔야
정부는 다양한 지배구조 이슈 중에서도 모·자회사 중복 상장 문제를 콕 짚었다. 2022년 LG화학이 알짜 배터리 사업부를 물적 분할해 LG에너지솔루션을 상장한 것이나 카카오가 카카오뱅크·카카오페이 등을 줄줄이 상장한 사례 등은 지배구조 문제로 한국 증시가 저평가를 받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정부는 LG에너지솔루션 사례처럼 성장성 높은 사업 부문을 물적 분할해 자회사를 상장할 경우 모회사 일반 주주 권익을 보호·증진할 수 있는 방안을 내놓을 것을 제안했다. 그렇지 않으면 분할 자회사를 비상장 완전 자회사로 유지하겠다는 계획을 투자자들에게 설명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지배주주나 특수관계인이 비상장 개인 회사를 통해 상장사 이익을 이전하는 ‘터널링’과 관련해 정확한 사실관계나 향후 계획 등도 투자자에게 설명하는 게 필요하다고 정부는 짚었다.
이날 발표된 밸류업 가이드라인의 가장 큰 특징은 이런 비재무적 정보와 함께 미래 지향적인 사안을 공시 대상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재무 정보는 과거 실적에 대한 정보인 만큼 기업가치를 정확하게 평가하려면 기업이 중장기적인 목표를 제시하고 계획 수립과 이행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거래소 공시 규정에도 이미 예측 정보와 관련한 면책 규정이 마련돼 있는 만큼 기업 부담도 크지 않다는 설명이다.
정부는 목표 변경이 불가피하다면 정정 공시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앨릭스 에드먼스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는 이날 자본시장연구원과의 대담에서 밸류업에 대해 “기업이 투명하지 않아 정보가 없으면 불확실성으로 가치가 저평가될 수 있다”며 “기업이 장기적인 가치 제고 계획을 공시하고 원하는 투자자들에게 실적 이상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말했다.
관건은 기업들이 자율적인 밸류업 공시에 얼마나 적극적이고 빠르게 호응할 것인지다. 이번 가이드라인은 공시 참여는 물론이고 작성 내용까지 모두 기업 자율이다. 일본은 지난해 3월부터 자율적인 공시를 유도했으나 지난해 말까지 상장사의 26% 정도만 참여했다. 공시 기업 수가 늘어나면서 올해 3월 말 기준 45%로 늘었으나 공시가 정착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정부는 이달 중 가이드라인을 확정하고 준비되는 기업부터 공시에 나설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나 아직 구체적인 일정은 확실하지 않다. 기업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아무리 빨라도 2~3개월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몇몇 대기업이 앞장서야 다른 기업들도 조금씩 참여할 가능성이 크다.
일단 정부는 밸류업 자체가 긴 호흡으로 꾸준하게 추진하는 과제인 만큼 서두르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이날 박민우 금융위 자본시장국장은 “급하게 공시하는 것보다 자율적으로 제대로 계획을 수립해 제대로 공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진정성 있는 공시가 좋은 시장 평가를 받고 투자로 이어지는 등 선례가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투자자가 비교해야 할 지표가 많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모호하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가령 숫자로 비교할 수 있는 재무지표 항목에서도 주가순자산비율(PBR)·주가수익비율(PER) 등 시장 평가 지표, 자기자본이익률(ROE) 등 자본 효율성 지표, 배당 및 자사주 소각 등 주주 환원 지표 가운데 어떤 지표를 내세울지도 기업 자율이다. 적자 기업일 경우 영업이익이 마이너스라 PBR이나 PER 등을 입력할 수 없는데 이 경우 매출·이익 증가율 중심으로 작성할 수 있다. 그만큼 기업 자율에 무게를 둔 것이지만 투자자에 혼선을 초래할 여지도 있다.
이 때문에 자율성도 좋지만 확실한 페널티와 인센티브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오랫동안 저평가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고 국내 투자자들이 투자를 늘리려면 결국 세제 등 확실한 인센티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국은 구체적인 검토가 마무리되는 대로 세제 지원 방안을 발표한다는 계획이다.
이준서 한국증권학회장(동국대 경영학과 교수)은 “배당 등 세제 관련 내용 없이는 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겠지만 당국의 밸류업 의지를 재확인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자율성에 기반을 둔 밸류업과 별개로 상장 요건 등을 강화해 좀비 상장사에 대한 퇴출이 이뤄져야 훨씬 효과적인 대책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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