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시절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낸 윤증현 윤(尹)경제연구소 소장이 전 국민에게 25만 원 지급을 추진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에 대해 공당(公黨)이 아닌 사익 집단이 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재정 지출 효과가 의심되는데다 위헌 가능성까지 있기 때문이다.
윤 전 장관은 13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처분적 법률을 통한 전 국민 25만 원 지급은 더 말할 가치조차 없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야당이 이런 식의 정강 정책을 내세우면 사익 집단밖에 안 되는 것”이라며 “(민주당이) 처분적 법률을 통해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는 헌법 위반”이라고 일갈했다. 처분적 법률은 법문 자체에 구체적인 행정처분을 명시해 행정부나 사법부 내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집행력을 갖도록 하는 법안이다. 현재 민주당은 정부와 여당이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통한 전 국민 25만 원 지급에 반대하자 처분적 법률 방식으로 추진하겠다고 정부와 여당을 압박하고 있다.
윤 전 장관은 이런 방식은 공당으로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추진하는 정책이라기보다는 극성 지지자와 향후 선거 투표자의 환심을 사기 위한 악성 포퓰리즘이라는 입장이다. 윤 전 장관은 “야당의 시도는 (포퓰리즘을 통해) 국민 의식을 (정당이 앞장서서) 후퇴시키는 행위”라며 “이렇게 되면 나라가 아르헨티나와 그리스 같이 추락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윤 전 장관은 1971년 공직에 발을 들인 뒤 40여 년 동안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최전방에서 겪은 한국 경제의 산증인이다. 참여정부 시절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부터 2011년까지는 기재부 장관으로 경제사령탑 역할을 했다. 그런 그가 헌법에 명시돼 있는 정부의 고유 권한을 무시한 채 전 국민 25만 원의 민생지원금 지급을 추진하는 야당에 대해 격정적인 반응을 쏟아냈다. “비이성적” “있을 수 없는 일”과 같은 거친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번 사안은 “언론이 여당과 야당 양비, 양시론을 펼치면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그만큼 사안이 중대하다는 의미다.
윤 전 장관은 “복지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있다”며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지속 가능성이 있게 하는 게 그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전 국민에게 지원금을 나눠주는 게 아니라 맞춤형으로 해야 한다”며 “중산층과 상류층에게 똑같이 나눠주면 되겠느냐”고 지적했다. 윤 전 장관은 “차라리 중산층 이상 계층에게 줄 돈을 서민에게 몰아줘서 50만 원을 지급하는 게 낫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예산편성권은 정부 고유 권한이므로 처분적 법률을 활용한 재정 지출은 헌법 조항을 우회하는 일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헌법 제54조 2항은 정부는 회계연도마다 예산안을 편성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57조는 국회는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을 마음대로 증액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국회가 국가재정을 낭비할 수 있는 요인을 사전에 막아둔 것이다.
고려대 총장을 지낸 이필상 서울대 경제학부 특임교수는 “야당의 특별법 제정을 통한 전 국민 25만 원 지급은 무리하는 것”이라며 “중산층과 고소득층을 포함해 전 국민에게 일률적으로 돈을 나눠주는 것은 재정 낭비”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이를 위해서는 정부가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야 하는데 이 경우 재정 건전성이 나빠질 뿐만 아니라 시장금리가 올라 가뜩이나 ‘3고’로 고통받는 서민들의 어려움을 가중시킬 것”이라며 “서민과 영세 상인을 중심으로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게 맞다”고 설명했다.
황성현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 역시 “세금을 걷는 행위에서 이미 자원배분이 왜곡되기 때문에 다시 나눠준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다”라며 “꼭 쓰려면 저소득층이나 취약 계층의 한계 소비 성향이 높으니 그런 분들에게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도 “돈은 모여 있어야 효과가 높아진다”며 “잠재력이 높은 분야에 과감하게 투자하면 미래의 생산성을 끌어올릴 수 있겠지만 전 국민에게 똑같이 나눠주면 그냥 외식 한두 번 하고 끝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무차별적인 재정 흩뿌리기가 거시정책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이 전 총장은 “그 정도 재원을 조달하려면 결국 국채를 더 발행할 수밖에 없다. 결국 재정건정성이 악화될 것”이라며 “국채를 불필요하게 많이 발행하면 시장금리를 높이는 것도 문제”라고 설명했다. 민주당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편성할 경우 국채시장이 자금을 빨아들여 정작 기업들이 경영에 필요한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의미다.
한국개발연구원(KDI)도 이날 “반도체 수출 증가세 덕에 실질 민간소비 여건이 점차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며 “현 상황에서 민간소비 부양을 위한 단기적인 거시정책의 필요성은 높지 않다”고 밝혔다. 사실상 야당의 대규모 추경을 직격한 것이다. 정규철 KDI 경제분석실장은 “구매력이 개선될 때 부양책을 쓰면 오히려 인플레이션을 자극해 금리 인하 시점을 늦출 수 있다”고 우려했다.
조동근 명지대 교수는 민주당이 민생 부양책을 내놓는 시점이 틀렸다는 입장이다. 그는 “지금은 1분기 국내총생산(GDP)이 1.3% 성장하는 등 회복기”라며 “굳이 따지자면 민주당의 민생지원금은 때를 놓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선거가 다 끝나고 나서야 특별법을 주장하는 것은 포퓰리즘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유승민 전 의원은 특별법 방식으로 민생회복지원금을 추진하는 것은 3권분립 위반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민주당이 총선에 압승하더니 금세 오만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며 “야당의 특별법은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유 의원은 “헌법 54조·56조에 따라 예산편성권은 정부에 있고 국회는 헌법 57조에 따라 예산을 증액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하려면 정부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며 “민주당이 법안을 낸다면 여당은 당연히 헌법재판소에 제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황 교수도 “일부 의원내각제 국가들은 법문에 구체적인 예산·행정 집행 방식을 명문화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는 대통령제”라며 “상식적으로 봐도 위헌”이라고 지적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