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구미국가산업단지에 위치한 정밀 프레스 가공 업체 케이앤이. 공장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보행자의 이동 경로를 유도하는 바닥의 동선 표시선이 눈에 들어온다. 지게차와 보행자가 겹치지 않도록 구역이 서로 다른 색으로 뚜렷이 구분돼 있다. 또한 벽면 전체에는 비상 대피로가 큼지막하게 안내돼 있다. 보행자 이동 안내선을 따라 공장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자 소화 및 응급 처치 물품이 보관돼 있는 구역이 나온다. 역시 벽면에 크게 안내 사인이 그려져 있어 한 눈에 찾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생산 현장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보호 장비도 표시돼 있어 처음 온 사람도 당연하게 착용할 수 있다. 귀마개를 끼고 프레스 장비 근처로 이동했다. 기계 소음 때문에 의사소통이 쉽지 않지만 안전 관련 물품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령 소화기 비치 장소 안내 표시가 일반적인 눈높이 보다 높게 부착돼 있는 식이다. 적재물이나 기계 설비에 가려지지 않도록 한 것이다. 박시연 케이앤이 부사장은 “안전 디자인 도입 이전엔 근로자들에게 귀마개 착용을 강조해도 불편함을 이유로 착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며 “하지만 도입 이후엔 안전에 대한 인식이 전반적으로 높아졌고, 이제는 근로자들이 자발적으로 보호 장비를 착용한다”고 말했다.
중대재해처벌법(중대법)이 올 1월부터 50인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 시행되며 안전 관리의 필요성이 현장을 중심으로 크게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업종마다 공장 구조나 업무 방식이 제각각인데다 영세한 사업장일수록 인력·비용 측면에서 안전 환경 요건을 갖추는 데 여전히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근로 환경 개선 및 근로자들의 의식 제고에 도움을 주는 안전 디자인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22일 중기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연 매출 90억 원, 근로자 수 29명으로 기업 규모가 작은 케이앤이가 대기업 수준의 안전 서비스 디자인을 도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난해 한국디자인진흥원의 ‘안전 서비스 디자인 사업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진흥원과 산업단지공단이 2022년부터 스마트그린산업단지 입주 기업을 대상으로 시행하고 있는 이 사업은 사업장 개선을 통해 산업 재해 사고 발생을 예방하도록 돕기 위해 마련됐다. 안전 서비스 디자인은 사고 예방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강화해 궁극적인 행동 변화를 이끌어 내는 걸 목표로 한다.
이 사업을 통해 진흥원은 1년에 8개 기업을 선정하고, 진단·발견·정의·개발·전달 등의 단계를 거쳐 안전 서비스 디자인을 도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과정에서 실제 현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근로자의 의견을 적극 수용해 기업당 총 10시간 이상의 컨설팅을 진행한다. 이러한 점이 중대법 4조 7항에 명시돼 있는 ‘종사자의 의견을 듣는 절차 및 개선방안을 마련해 이행하는지 반기 1회 이상 점검’에 적합해 기업들의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케이앤이는 디자인 전문 컨설턴트와 근로자, 관리자가 모여 안전한 작업 환경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대안책을 함께 발굴했다. 약 5개월 동안의 컨설팅 기간을 거쳐 총 7개의 핵심 문제를 발견했으며 17개의 개선책을 도출해냈다. 이 과정에서 근로자의 시선에서 위험하게 여겨지는 요소들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사진 촬영을 하거나 도입이 시급한 안전 디자인 투표를 진행하는 등 적극적인 참여가 이어졌다. 그 결과 근로자들의 행동에도 변화가 생겼다. 바로 보호 장비를 자발적으로 착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케이앤이는 인근에 신공장 건설을 계획 중인데 아예 설계 과정에서부터 안전 서비스 디자인을 도입한다는 방침이다. 박 부사장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면 늦는다는 마음으로 사고 예방을 위해 안전 서비스 디자인 사업에 지원했다”며 “내년 초에 새롭게 짓는 공장에는 처음부터 안전 디자인을 적용해 중대 재해 발생을 막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안전 서비스 디자인이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같은 즉각적인 행동 변화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이에 진흥원과 산단공은 일반 기업도 안전 서비스 디자인을 적용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제작해 배포하고 있다. 조혜영 산단공 부이사장은 “산업 현장의 안전을 위해 공공과 전문가, 지자체 등과의 협력이 매우 중요하다”며 “안전 디자인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효과를 검증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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