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규모가 훨씬 커지고 글로벌화돼 있는데 지금처럼 옹색한 상속세 체계에서는 앞으로 작은 기업들도 상속세 때문에 다 문을 닫아야 할 것입니다.”(윤영선 전 관세청장)
한국 경제 규모가 240% 이상 확대되는 동안 상속세는 2000년 이후 단 한 차례도 개편이 이뤄지지 않아 기업의 경제활동을 위축시키고 개인들의 자금 유출을 부추긴다는 지적이 확산하고 있다. 상속세가 세금으로서의 기능보다는 부자를 벌주겠다는 징벌적 성격의 ‘이념세’라는 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3일 통계청에 따르면 외환위기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던 2000년 652조 원이었던 한국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2236조 원으로 240% 넘게 커졌다. 경제 규모가 3배 넘게 커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KB부동산에 따르면 올해 4월 기준 전국 아파트 매매가격 지수는 89.5로 2000년 4월(30.4) 대비 194.3% 급증했다.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 지수는 같은 기간 270% 넘게 폭등했다. 물가도 덩달아 뛰었다.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는 62.7에서 114.0으로 81.8% 상승했다.
한국 경제가 커지고 부동산 가격과 물가는 급등했지만 상속세는 그대로다. 상속 재산이 10억 원을 넘기면 대부분 상속세 과세 대상이 되는데 4월 기준 서울 지역의 아파트 매매 중위가격만 9억 5333만 원이다. 서울에 아파트 한 채만 보유해도 잠재적인 상속세 과세 대상이 되는 셈이다. 실제로 상속이 발생했을 때 상속세 납부 대상에 오른 상속세 과세자 비율은 2000년 0.7%에서 2010년 1.4%, 2020년 2.9%, 2022년 4.5% 수준으로 가파르게 치솟고 있다.
세율만 해도 2000년 45%에서 50%로 상향된 뒤 24년째 변화가 없다. 기업 최대주주의 경우에는 20% 가산 할증 평가까지 적용된다.
전문가들은 상속세 개편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경제신문이 2008년 이후 기획재정부 세제실장을 지낸 5명을 인터뷰한 결과 이들은 한목소리로 “유산세 구조인 상속세를 유산취득세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산세 방식은 피상속인의 유산 전체를 하나의 과세 대상으로 간주하는 반면 유산취득세는 상속인 각자가 물려 받은 재산을 기준으로 별도의 세금을 매긴다. 상속세는 누진세율로 과세되기 때문에 과세표준을 낮출 수 있는 유산취득세가 납세자 입장에서 유리하다.
세제실장과 관세청장을 역임한 윤영선 법무법인 광장 고문은 “현재의 유산세는 가족 제도가 오형제·육남매 등 대가족을 중심으로 이뤄져 있을 때 전산이 잘 돼 있지 않아 국가에서 세금을 걷기 쉬운 방식을 택한 것”이라며 “하지만 지금은 가족 구조와 과세 환경이 크게 바뀌었고 금융실명제 등 재산을 평가하기가 쉬워져 (유산세는) 우리 경제에 안 맞는 옷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대로라면 (과도한 세금 탓에) 국가가 모든 기업의 주인이 될 것”이라며 “아파트도 국가 소유가 될 것이고 이는 결국 완전히 사회주의 국가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산취득세로의 조정과 함께 세율도 낮춰야 한다는 분석이 많다. 현재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50%인데 최대주주 할증 과세까지 감안하면 실제 상속세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가장 높은 60%에 달한다. 세제실장과 관세청장을 지낸 김낙회 법무법인 율촌 고문은 “해외의 경우 상속세 과세자 비율이 2~3% 수준인데 우리나라는 4~5%에 이른다”며 “그동안의 물가 상승률과 지금의 과세자 비율 등을 고려했을 때 부담을 완화하는 쪽으로 조정할 필요성이 분명 있다”고 조언했다.
기업을 옥죄는 대주주 할증 과세를 없애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송헌재 서울시립대 교수에 따르면 상속세가 1조 원 증가하면 경제성장률은 0.63%포인트 하락한다. 익명을 요구한 A 전 실장은 “안 그래도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이 아닌데 상속세가 높으면 경영권 승계가 안 돼 경영 유인이 더 떨어진다”며 “경영진이 미래 사업 계획 등을 짜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상속세를 줄일 수 있을까, 해외로 자본을 유출할 방법은 없을까 등을 더 고민하게 만들어 현행 상속세는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 크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대주주 할증 과세부터 없애야 한다”고 덧붙였다.
익명을 요청한 전직 세제실장 B씨는 “상속세는 세금으로서의 기능보다는 합리성·효율성이 없는 지극히 징벌적인 이념세”라며 “가장 시급한 것이 상속·증여세 개편”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기회에 증여세를 포함해 전반적인 체계를 손봐야 한다는 분석도 있다. C 전 실장은 “물가 상승률 등을 감안해 공제 한도 조정 등도 필요한데 이 경우 상속세뿐만 아니라 증여세 한도도 함께 개편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