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헬스케어 기업에게 에스토니아인 20만 명의 유전·질병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열릴 전망이다. 에스토니아 인구 20%에 달하는 수준으로, 에스토니아는 2002년부터 신약 개발과 인구 집단 특성 파악을 목적으로 국민 다수의 디옥시리보핵산(DNA) 및 각종 질병, 생활 데이터를 축적해 온 바 있다. 국내에도 DNA 데이터를 수집한 국립중앙인체자원은행 등이 있지만 대부분 정보가 우리 국민의 DNA 현황 등 인구 집단 특성을 파악하는 데 맞춰져 있다. 각종 유전·질병·생활 습관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게 되면 국내 헬스케어 산업의 한 단계 도약도 가시화될 전망이다.
중소벤처기업부는 3일(현지 시각)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에스토니아 사회부와 국장급 협의를 개최하고 에스토니아의 유전체 정보 등 의료 데이터 공동 활용 방안을 논의했다고 4일 밝혔다. 에스토니아는 2002년부터 100만 명 분의 각종 유전, 질환·질병, 생활 습관 등을 수집해 데이터화 하는 ‘에스토니아 바이오뱅크’ 사업을 추진 중이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인구의 5분의 1에 달하는 20만여 명 분의 데이터를 상시 수집해 관리하고 있다. 바이오뱅크란 국민 생체 정보를 빅데이터로 구축해 질병 예측이나 맞춤형 진료, 신약 개발 등에 활용하는 사업을 말한다.
이날 중기부는 에스토니아 사회부와 우리 기업이 에스토니아가 보유한 유전체 정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구체적 절차와 방법을 논의했다. 우리나라도 2008년부터 바이오뱅크 사업을 전개하고 있지만 개인정보 보호 등의 이유로 유전 정보에 질병이나 생활 습관 등 다른 정보가 연계돼 있지 않아 질병 연구나 신약 개발 등에 활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중기부 관계자는 “에스토니아 사회부와 정보 활용에 대한 큰 틀의 합의를 한 후 절차 등을 논의하기 위해 현지를 찾은 것”이라며 “우리나라 바이오뱅크의 경우 유전 정보 중심이어서 일선 기업들이 사업에 활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전했다.
에스토니아는 국내에는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국민 생체 정보를 데이터화 하는 바이오뱅크와 관련해서는 세계 선두에 있는 국가로 평가된다. 바이오뱅크는 크게 국민 DNA 특성 등을 파악하기 위해 유전 정보를 데이터로 만드는 ‘인구 집단 바이오뱅크’와 각종 유전·질병·생체 정보를 연계해 신약 개발 등에 쓰는 ‘질환 기반 바이오뱅크’로 나뉘는데 우리나라 바이오뱅크는 전자, 에스토니아 바이오뱅크는 후자에 속한다. 2002년부터 일찍이 고품질 데이터를 축적해와 2014년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헬스케어 웹사이트를 구축하면서 “에스토니아인들을 초대해야 했다”는 농담을 던지기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에스토니아가 한국 기업에게 자국 국민 데이터를 개방하는 배경으로는 해외 기업 유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에스토니아는 발트해 인근의 인구 130만 명 규모 소국이지만 개방적인 기업 환경과 낮은 세율 등을 통해 다수의 해외 기업을 유치해 국민 소득은 약 3만 달러 수준이다. 스타트업 생태계도 발달해 있어 글로벌 스타트업 평가 기관 스타트업블링크의 ‘스타트업 생태계 순위’ 조사에서는 한국(20위)에 앞선 12위에 올랐다. 이 조사에서 1~3위에 오른 국가는 스타트업 생태계 선도국으로 잘 알려진 미국, 영국, 이스라엘이다.
양국이 지원 절차 등 세부 사항까지 합의하면 중기부가 지난달 발족해 인공지능(AI) 헬스케어 분야에 특화한 강원 글로벌혁신특구 입주 기업이 협력 수혜를 받을 전망이다. 중기부는 지난해부터 글로벌혁신특구 사업을 추진하면서 특구 입주 기업이 해외에서 실증, 공동 연구개발(R&D) 등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강원도 관계자는 “글로벌혁신특구 입주 기업이 에스토니아 현지에 연구 센터를 설립하면 에스토니아 정부가 데이터를 개방하는 조건 등을 두고 협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홍주 중기부 특구혁신기획단장은 “강원 글로벌혁신특구 기업들이 에스토니아가 구축한 방대한 양의 헬스케어 데이터를 활용한다면 AI헬스케어 기술개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기술개발에 그치지 않고 유럽을 포함한 글로벌 시장 진출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지원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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