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다 TSMC 때문이다.” 201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TSMC 관련 기사와 게시물에 따라붙던 댓글이다. 당시 TSMC는 반도체 업계의 ‘골칫덩이’였다. 이 회사가 제시한 공정 로드맵은 툭하면 일정이 미뤄졌고 수율까지 낮아 중앙처리장치(CPU), 그래픽처리장치(GPU) 공급난의 주범으로 꼽혔다. TSMC가 ‘공공의 적’이던 당시 기술력의 대표 주자는 인텔과 삼성전자였다. TSMC의 현재 위상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TSMC가 급성장한 출발점에는 2008년 자체 팹을 매각한 AMD가 있었다. AMD 창업자 제리 샌더스가 “진짜 사나이는 팹을 지녀야 한다(Real men have Fabs)”는 말을 남겼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AMD 물량은 TSMC가 매출과 공정 역량을 확보하는 데 큰 자산이 된다. 이어 인텔도 10㎚(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 공정 진입을 포기하면서 TSMC와 초미세공정 경쟁을 이어가는 기업은 삼성전자만 남게 된다.
애플 영입도 TSMC의 성장을 가속화했다. 애플은 2007년 첫 아이폰부터 2010년 아이폰4 출시 전까지 삼성전자가 설계·제조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를 썼고 자체 칩셋을 내놓은 후에도 삼성전자에서 제조해왔다. 그러다가 2014년 아이폰6부터 TSMC에 칩셋 생산을 맡긴다. 애플이 TSMC를 택하기 직전 해인 2013년 5970억 대만달러(약 25조 6000억 원)에 불과하던 TSMC 연 매출은 지난해 2조 1600억 대만달러(약 92조 6000억 원)로 10년 새 3.6배 폭증했다. 현재도 TSMC 매출의 절반가량은 애플에서 나온다.
2020년 8㎚ 시절까지도 엔비디아 GPU를 생산하던 삼성전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의 위상은 예전 같지 않다. 엔비디아는 물론 AMD까지도 삼성전자의 3㎚ 대신 TSMC의 4~5㎚를 택한다. 숫자로 표기된 선폭과 관계없이 양산 결과물은 TSMC가 낫다는 뜻이다. 삼성전자가 처한 위기의 본질을 읽어보자. AMD가 팹을 매각하고 과거 인텔이 장비 투자를 꺼린 것은 종합반도체기업(IDM)으로서 설계와 생산 양면전이 힘에 부쳤기 때문이다. IDM인 삼성전자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다. 태생적 한계도 있다. “고객사와 경쟁하지 않는다”는 TSMC와 달리 삼성전자는 고객사와의 경쟁이 불가피하다. 애플이 2~3년 후 내놓을 아이폰에 관한 정보를 고스란히 노출하면서까지 삼성전자에 생산을 맡길 이유가 있을까.
체질 문제도 있다. 인텔을 거쳐 다른 빅테크에서 일하는 반도체 설계 엔지니어는 “이직해보니 인텔·삼성전자 파운드리를 사용할 수가 없다”고 했다. 모든 구조가 내부 물량 위주로 짜여 있어 설계자산(IP)을 이용하기가 너무 불편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TSMC는 불편함이 있다면 고객사 맞춤형으로 시스템을 개선해주지만 다른 파운드리는 늘 자사가 우선”이라고 지적했다. 실질적 ‘고객’인 담당 엔지니어들이 TSMC를 선호하니 최종 발주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달 12일(현지 시간) 실리콘밸리에서 열린 ‘삼성 파운드리 포럼 2024’에서는 시장에서 기대를 모았던 1㎚대 신공정 공개는 없었다. 하지만 외려 그 지점에서 희망의 빛을 볼 수 있었다. 미세화보다 완성도에 초점을 맞춘 공정 로드맵에서는 초미세공정 숫자 싸움보다는 ‘내실’에 집중하겠다는 삼성의 변화가 읽혔다. 메모리와 패키징 역량을 결합해 보다 빨리 완성품을 제공하겠다는 원팀 전략과 “과거 자사가 우선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부터는 고객사에도 마치 삼성전자 내부에서 제작하는 듯한 경험을 주겠다”는 송태중 파운드리 사업개발팀장의 고백이 인상 깊었다. 그간 발목을 잡았던 IDM 체질을 버리고 ‘고객 지향’으로 변화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새롭게 삼성전자 DS(반도체) 부문을 이끌게 된 전영현 부회장은 삼성SDI에서 갤럭시 노트7 폭발, 에너지저장장치(ESS) 화재 사태를 성공적으로 수습했던 인물이다. 새 리더십을 맞은 삼성전자가 교만함을 버리고 납품사의 겸허함으로 재도약하기를 기대해본다. ‘주문 제작’만이 아닌 메모리에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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