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분들과 국민 여러분께 걱정을 끼쳐드려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달 19일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 1층 로비. 긴장한 표정의 조병규 우리은행장이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다. 조 행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미리 준비해온 사과 코멘트를 힘겹게 마쳤다. 최근 우리은행 직원이 저지른 100억 원대 횡령 사건에 대한 대국민 사과였다.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출두하는 피의자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날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20개 은행의 행장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말이 간담회지 사실상 금융 감독 수장이 은행장들을 한데 모아놓고 최근 발생한 횡령·배임 등 잇단 금융 사고에 대해 엄중 경고하는 자리였다. 50대 초반의 검사 출신 금감원장은 은행권의 만연한 실적 중심주의, 허술한 조직 문화, 내부통제 부족 등이 금융 사고의 원인이라고 일갈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20명의 베테랑 뱅커들은 고개 숙인 채 ‘말씀’을 메모하기 바빴다.
이 원장은 이날 은행의 조직 문화를 감독할 수 있는 수단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도 넘은 관치’라는 지적이 나올 법한 발상이다. 하지만 최근 은행에서 발생한 횡령 등 금융 사고들을 살펴보면 반박할 면목이 없다. 강민국 국민의힘 의원이 금감원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8년부터 이달 14일까지 6년간 발생한 금융권 횡령액은 총 1804억 원에 달했다. 은행이 1533억 원(85.0%, 115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저축은행 164억 원(9.1%, 11명), 증권 60억 원(3.4%, 12명), 보험 43억 원(2.4%, 39명), 카드 2억 원(2명)이 뒤를 이었다. 실제 올 들어서도 수출입은행·하나은행·NH농협은행·신한은행 등에서 매달 횡령 사고가 보고됐다. 특히 우리은행은 2년 전 700억 원대 횡령 사고가 발생한 후 대대적인 내부통제 강화 방안을 실행했지만 올해 또 100억 원 규모의 횡령 사고가 터져 그간의 노력이 무색해졌다.
횡령 사고는 은행뿐 아니라 제조업·서비스업 등에서도 수시로 발생한다. 우리가 유독 은행권의 횡령 사고에 예민한 이유는 두 가지다. 은행은 신뢰를 바탕으로 돈을 다루는 곳이다. 고객은 은행이 돈을 잘 관리할 것이라고 믿고 맡긴다. 은행도 마찬가지다. 고객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이런저런 담보를 잡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고객이 돈을 잘 갚을 것이라는 신뢰 속에 대출해준다. ‘은행’이라는 곳이 생겨난 후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가장 큰 배경은 바로 신뢰다. 그런 은행이 신뢰를 헌신짝처럼 저버린다면 금융 시스템 자체가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은행원들 틈에 고양이들이 섞여 있다면 어떤 고객이 생선을 맡기겠는가.
또 다른 이유는 뱅커들의 연봉이 다른 업종에 비해 많다는 점이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의 직원(임원 제외) 근로소득은 평균 1억 1265만 원이었다. 억대 연봉을 받으면서 고객의 돈까지 훔치는 돈 욕심에 분노가 치미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자는 금융계에 40년을 몸담았던 한 금융지주 회장에게 “왜 은행은 직원들에게 급여를 많이 주느냐”며 따져 물었던 적이 있다. 그 회장의 답은 이랬다. “은행은 돈을 다루는 곳이죠. 은행원은 종일 돈을 만집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나쁜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이죠. 그래서 급여를 많이 줍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말이죠. 아울러 선을 넘으면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을 수 있다는 경계감도 줄 수 있죠.” 완전히 수긍할 수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었다.
견득사의(見得思義). 강릉 오죽헌 입구에 서 있는 율곡 이이의 동상 앞 큰 돌판에 아로새겨 있는 글귀다. ‘이득을 보면 의로운 것인가 생각하라’는 뜻으로 율곡이 평생 금과옥조로 여겼던 공자의 말씀이다. 오죽헌은 신사임당과 율곡이 태어나 자란 곳으로 세계 최초의 모자(母子) 화폐 인물(신사임당 5만 원권, 율곡 5000원 권)을 배출했다. 신사임당과 율곡은 돈을 다루는 은행원이라면 매일 만나는 선조다. 그들이 후세의 은행원들에게 걸어오는 ‘말씀’에 항상 귀 기울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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