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이 자체 차량용 반도체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아직 구체적 기술 개발 로드맵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최근 국내 팹리스(반도체 설계 회사)들과 잇달아 미팅을 열면서 사업을 점차 구체화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통상 칩을 설계할 때 이 칩을 만들어줄 공장(파운드리)과 개발 초기 단계에서부터 협의를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삼성전자와 TSMC의 현대차 잡기 경쟁이 이미 시작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9일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현대차는 지난달 말 복수의 디자인솔루션파트너(DSP) 업체들과 차량용 반도체 설계와 관련한 비즈니스 미팅을 가졌다.
미팅에는 에이디테크놀로지·가온칩스·세미파이브·코아시아 등 삼성전자 파운드리 DSP 파트너와 에이직랜드·알파웨이브 등 TSMC 밸류체인얼라이언스(VCA) DSP 업체들이 대거 참여했다. DSP는 팹리스가 설계한 반도체를 파운드리가 제조할 수 있도록 최적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이 때문에 현대차가 DSP 업체들과 협력해 일부 차량용 반도체의 설계에 직접 나서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들 업체는 팹리스가 설계한 반도체를 파운드리(위탁 생산) 공정에 맞게 디자인해주는 게 기본 역할이지만 팹리스 능력도 갖추고 있다”며 “현대차가 팹리스에서 어느 정도 주도권을 쥐고 가느냐에 따라 역할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는 최근 들어 반도체 설계 인재 영입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올해 상반기 전력반도체 개발자를 대거 영입한 데 이어 지난달에는 차량용 반도체 개발을 위한 설계 경력 개발자를 연말까지 모집한다고 공지했다. 모집 대상은 차량과 모바일, 가전 분야의 3년 이상의 반도체 설계 경력자다. 지난해 6월 신설된 반도체개발실이 실무 업무를 주도하고 있다.
완성차 및 반도체 업계에서는 현대차의 자체 차량용 칩 개발을 선택이 아닌 필수로 보고 있다. 특히 자율주행 자동차는 ‘바퀴 달린 슈퍼컴퓨터’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한 연산 기능을 필요로 한다. 자연히 자동차 1대에 탑재되는 반도체 양도 늘어나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IHS에 따르면 지난해 760억 달러였던 차량용 반도체 시장 매출은 2029년 1430억 달러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차량용 반도체 공급망의 불확실한 변화도 완성차 회사들이 내재화에 속도를 올려야 하는 이유다. 코로나 팬데믹이 극심했던 2021년에는 차량용 반도체 공급이 크게 부족해지면서 세계 주요 완성차 업체들의 생산 라인이 중단되기도 했다. 손톱만한 칩 하나가 없어서 라인 전체가 멈추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업계의 시선은 현대차가 선택할 파운드리로 몰리고 있다. 자율주행 등 고급 기능을 수행할 5㎚(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 칩을 설계한 뒤 생산하려면 삼성전자나 TSMC, 미국 인텔 등으로 선택지가 좁아진다. 전 세계 빅테크들의 러브콜을 받는 TSMC라고 할지라도 완성차 3위 현대차의 물량을 삼성전자에 순순히 내주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다. 조 단위 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삼성 파운드리 역시 고객 확보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실제 삼성전자는 이날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삼성 파운드리포럼 2024’를 열고 자신들의 경쟁력을 고객사들에 집중 홍보했다. 세계 최초로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구조로 양산에 성공한 3나노 공정과 최근 일본 인공지능(AI) 가속기 업체로부터 수주를 따낸 2나노 공정 등이 삼성의 자랑거리다. 여기에 메모리와2.5D(차원) 패키징 기술까지 한꺼번에 제공하는 ‘턴키 솔루션’ 역시 TSMC와 같은 경쟁업체와 차별화되는 장점이다.
자동차 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대차가 자제 칩 설계에 나선다면 차량에 탑재되는 수많은 소프트웨어를 제어하는 컨트롤러 칩부터 개발할 가능성이 크다”며 “미래 자동차에 탑재되는 자율주행 칩은 각종 편의 및 안전 기능을 한꺼번에 컨트롤해야 하기 때문에 빠른 처리 속도를 갖춘 대용량의 반도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파운드리 포럼에 참석한 차량용 반도체 기업인 텔레칩스의 이장규 대표는 “그동안 삼성 파운드리와 함께 43개의 칩을 만들어왔다”며 “삼성은 텔레칩스의 성장을 지원해 준 파트너”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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