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22대 국회 개원 이후 처음으로 주요 민생 법안들을 합의 처리하면서 ‘야당 입법 강행-대통령 거부권-재표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데 성공했다. 개원 석 달이 다되도록 제대로 된 민생 법안 하나조차 합의하지 못하는 ‘역대 최악의 국회’라는 비난이 거세지자 여야가 비쟁점 법안들을 중심으로 뒤늦게 밀린 숙제를 처리했다는 평가다. 다만 ‘고준위방폐장 특별법’과 ‘전력망 특별법’ 등 하루 빨리 통과가 시급한 에너지 관련 민생 법안들은 9월 정기국회로 또다시 미뤄졌다.
2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간호법은 현재 의료법 등에서 규정하고 있는 간호사 등의 업무를 떼어내 독자적 법률로 제정됐다. 제정안은 의사의 수술 집도 등을 보조하면서 의사 업무를 일부 담당하는 진료지원(PA) 간호사를 명문화하고 그 의료 행위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게 핵심이다. 미국과 영국 등 PA 간호사가 법제화돼 있는 해외와 달리 국내 의료법에는 관련 근거 규정이 없었다. 대한간호협회가 1977년 처음 법제화를 요구한 후 47년간 이어진 간호계의 숙원이 풀렸다는 평가다. 간호법은 2005년 17대 국회에서 처음 발의됐다.
본회의를 통과함에 따라 의사 업무 일부를 대신할 수 있는 PA 간호사 합법화로 최근 의료 대란에 따른 진료 공백을 일정 부분 해소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이날 방청석에서 회의를 지켜보던 대한간호협회 소속 회원들은 간호법이 통과되자 손뼉을 치며 기뻐했고 일부는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2대 국회 상임위에서 여야가 첫 타결을 이룬 전세사기피해지원 특별법도 본회의 문턱을 넘었다. 이에 따라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전세사기 피해 주택을 경매로 낙찰 받은 뒤 그 차익을 임대료로 사용해 피해자에게 해당 주택을 공공임대로 최장 20년간 제공한다. 또 전세사기 피해자 요건 중 임차 보증금 한도를 현행 3억 원에서 5억 원으로 상향했다.
양육 의무를 저버린 부모는 상속권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일명 ‘구하라법(민법 개정안)’은 2019년 가수 구하라 씨가 사망한 지 5년 만에 입법이 완료됐다. 피상속인에 대한 부양 의무를 중대하게 위반하거나 중대한 범죄 행위, 또는 그밖에 심히 부당한 대우를 한 경우를 '상속권 상실'이 가능한 조건으로 적시했다.
또 취약 계층에 도시가스 감면 서비스가 원활히 지원될 수 있도록 하는 도시가스사업법 개정안과 예금보험료율 한도 규정의 존속 기한을 2027년 12월 31일까지 연장한 예금자보호법 일부 개정안도 본회의에서 처리됐다.
‘택시월급제’ 시행을 서울을 제외한 전국에 2026년 8월 19일까지 2년 유예하는 택시발전법 개정안도 통과됐다. 아울러 대·중소기업 상생협력촉진법 개정안도 처리됨에 따라 자료의 부당 유용으로 중소기업에 피해가 우려될 때 법원에 이를 막아달라고 청구할 수 있게 됐다.
여야는 5월 30일 22대 국회 개원 이후 처음으로 민생 법안을 합의 처리한 데 대한 환영의 입장을 밝히면서도 다가올 9월 정기국회 주도권을 두고 기 싸움을 이어갔다.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본회의에 앞서 열린 여야 원내대표 회동에서 “늦게나마 민생 법안을 처리할 수 있게 돼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며 “곧 정기국회가 다가오는데 여야 모두 정쟁을 버리고 민생과 미래를 준비하는 법안 및 예산 심사를 통해 국민에게 보답하자”고 말했다.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국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 많이 늦어진 감이 있어 국민들에게 송구하다”며 “집권 여당은 민생회복지원금을 무조건 반대만 하지 말고 민생 회복을 위해 동참해달라”고 촉구했다.
다만 여야가 이날 모처럼 이견이 적은 비쟁점 법안들을 중심으로 총 28개 법안을 처리하는 성과를 이뤄냈지만 당장 통과가 시급한 에너지 관련 법안들은 또 다시 9월 정기국회로 넘기게 됐다. 고준위 특별법과 전력망 특별법 등은 소관 상임위에 상정된 후 아직 법안 심사에도 돌입하지 못한 상태다. 또 저출생 대응을 위해 육아휴직 기간을 연장하고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대상 연령과 사용 기간을 확대하는 일·가정 양립 지원법은 상임위에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본회의 직전 여야의 극적 타결로 제정된 간호법은 의사들의 강력한 반발과 PA 간호사의 구체적 업무 범위를 시행령에 위임해 갈등의 불씨가 여전하다는 우려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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