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의제 제한 없는 여야의정 협의체' 이야기를 꺼내면서 추석 연휴 전 협의체 출범 여부를 두고 의료계 안팎의 관심이 모이고 있다. 대한의사협회(의협)를 필두로 강경파들이 "정부가 2025학년도 증원 조정 의지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 한 협의체에 참여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과 달리, 병원단체 등 의료계 일각에서 대화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건 긍정적 요소로 꼽힌다.
12일 의료계에 따르면 대한병원협회(병협)와 상급종합병원협의회, 대한수련병원협의회 등 일부 병원단체들이 여야의정 협의체 참여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전국 병원 3500여 곳의 모임인 병협은 이미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별위원회에도 참여 중이다. 윤을식 대한수련병원협의회장(고려대의료원장)은 이날 서울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의제 제한 없는 여야의정 협의체를 구성하자는데 일단 대화는 해보는 게 맞지 않느냐"면서도 "전공의, 의대생들이 참여하지 않는 한 협의체 구성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의견도 있다. 내부적으로 참여 여부를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병협 관계자는 "협의체 참여 여부를 고려 중이다. 확정 여부는 전반적인 분위기를 봐서 결정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의료계에서는 전공의 집단 이탈 후 대다수 병원들이 경영난에 허덕이는 만큼, 건강보험 진료비 선지급 등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기 위해서라도 참여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앞서 보건복지부는 일부 대학교수들이 의협 주도의 집단 휴진에 참여하겠다고 밝히자 각 대학병원장에게 교수들의 집단 휴진을 불허해 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이를 방치할 경우 건강보험 진료비 선지급 대상에서 제외하겠다고 경고한 바 있다.
전일 국민의힘이 여야의정협의체에 동참해달라고 발송한 공문의 수신처에 이름을 올린 의료기관 단체는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의대협) △상급종합병원협의회 △대한병원협회 △수련병원협의회 △서울대병원 △세브란스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아산병원 △가톨릭대서울성모병원 △대한의사협회(의협)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 △전국의과대학교수비상대책위원회(전의비)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 △대한의학회 등 15곳이다. 이진우 대한의학회 회장은 전일(11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대한의학회의 '인턴수련제도 및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기자간담회'에서 "여야의정 협의체 제안을 환영한다. 의정사태의 시작과 끝이 정부의 정책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라서 협의체가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하려면 정부의 태도 변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발언해 긍정적 뉘앙스를 풍겼다.
서울대병원, 세브란스병원, 서울아산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성모병원 등 소위 '빅5' 병원들은 아직 협의체 참여 의사를 밝히지 않은 상태다. 다만 상급종합병원 47곳이 모인 상급종합병원협의회가 대화 자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만큼 이를 따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의료계 단체 중 상당수가 여야의정 협의체 참여를 전향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의료계 단일대오를 이루긴 쉽지 않아 보인다. 의료계 법정단체인 의협은 "협의체에 들어갈 의사가 없다"고 못을 박았다. 무엇보다 의정갈등을 해결할 열쇠를 쥐고 있는 전공의, 의대생들은 협의체 제안 이후 줄곧 침묵을 이어가고 있는 만큼 온전한 여야의정협의체가 출범하기는 힘들 것이란 회의론이 짙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병원 교수는 "의제 제한이 없다고 해놓고 정부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갈 것 아닌가. 한두번 속느냐"며 "전공의, 의대생들이 참여하지 않는 한 어떤 협의체가 나온들 사태가 해결되진 않을 것"이라고 냉소적인 입장을 밝혔다.
여야 간 입장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것도 협의체 출범의 또다른 걸림돌로 지목된다. 국회 보건복지위원장인 박주민 민주당 의원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의료대란 대책특별위원회와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 비상대책위원회 간담회에 앞서 "저희들은 당장의 상황을 해결하고 의료 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 25년 의대 정원 정상화를 포함해 모든 의제 테이블 올려서 논의하자고 주장했다"면서 "한동훈 대표도 이를 받았는데 그럼에도 정부와 여당에서 다른 소리가 나오고 있어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강희경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비대위원장은 "이번 사태의 본질은 단순히 2000명이라는 증원 규모가 아니라 2020년 합의안 파기에서 비롯된 신뢰의 붕괴라고 본다"며 "전공의와 의료진들이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되는 게 급선무다. 오늘 만남은 협의체 참여 여부를 논하기에 앞서 참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십사 부탁드리는 자리였다"고 말했다.
모처럼 논의선상에 오른 여야의정 협의체가 출범하기도 전에 삐걱대면서 산으로 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정치권의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 제안을 두고 의료계 셈범이 복잡해지는 와중에 환자단체도 참여를 요구하고 나섰다. 한국중증질환연합회는 이날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여야의정 협의체를 만든다면서 전공의를 포함한 의료계의 의견만 구하고 환자단체의 의견을 묻지 않는 것에 실망하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며 “‘여야의정 협의체’ 대신 ‘여야환의정 협의체’ 구성을 정식으로 제안한다”고 주장했다. 의료정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당사자인 만큼 환자단체가 참여해야 실효성 있는 의료정책을 세울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요구다.
이주열 남서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기존 의료개혁특별위원회에 참여 중인 의료계 단체, 특히 병원장들로 구성된 병원단체가 현재 논의 중인 여야의정 협의체에 참여하는 것은 목적과 동떨어지지 않나. 이들 단체를 의료계 대표로 참석시키면 전공의나 의과대학생들이 참여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전공의 및 의과대학생 단체가 필수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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