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랏빚이 늘어나면 물가가 뛰고 근로자가 손에 쥐는 소득이 상대적으로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정부 부채 증가가 가계에 미치는 영향이 겉으로는 크게 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물가와 실질소득에 악영향을 주는 만큼 재정 건전성을 유지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25일 한국재정학회에 따르면 이준상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팀은 ‘재정 건전성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이름의 논문을 이날 학회 추계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연구팀은 2000년 10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정부 부채와 소비자물가지수 등을 조사했다. 이들은 재정 건전성이 나빠지면 국가신용위험 증가와 원화 약세를 불러와 수입물가가 높아진다고 봤다. 또 정부 부채가 늘면 통화량이 증가하고 이는 국민들의 기대 인플레이션 상승으로 이어진다고 분석했다. 기대 인플레이션이 오르면 실제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이 같은 요인을 바탕으로 분석한 결과 정부 부채가 1% 증가하면 물가는 최대 0.15% 오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 부채 대비 재정지출이 1%포인트가량 늘어도 물가가 최대 0.13% 높아졌다. 문제는 한국의 정부 부채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해 52.9%인 한국의 일반정부 부채(D2)는 2026년 55%를 돌파하고 2029년(58.2%)에는 독일(57.8%)을 앞선다. ‘커진 정부 부채→물가 상승→근로자 실질소득 감소’로 이어질 수 있는 셈이다. 전국 가계의 실질소득은 올 2분기 전년 대비 0.8% 증가했지만 1분기만 해도 고물가에 1.6% 감소했다.
코로나19 이후인 2022년 한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5.1%에 달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원자재 가격이 급등했고 코로나19를 극복하기 위해 전 세계 정부가 푼 막대한 유동성이 한몫했다. 한국만 해도 2022년 나라살림을 보여주는 관리재정수지가 117조 원 적자였다. 국내총생산(GDP)의 5%에 달하는 수치다. 그만큼 재정을 많이 썼다는 것이다. 관리재정수지는 정부의 총수입에서 총지출을 뺀 뒤 국민연금이나 고용보험 같은 사회보장성 기금의 수지를 제외한 것이다.
이준상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연구진의 분석은 정부 씀씀이가 물가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입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해외에서는 거시경제학 부문의 세계적 석학인 로버트 배로 하버드대 교수와 프란체스코 비앙키 존스홉킨스대 교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이 코로나19 기간 추진한 확장적 재정정책이 인플레이션의 주요 원인이었다고 지적한 바 있지만 국내에서 이를 실제 입증한 것은 사실상 처음이다. 연구진은 “재정 충격의 소비자물가 기여도는 2022년 2분기 양(플러스)으로 전환됐다”며 “이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경제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재정정책이 소비자물가에 미치는 긍정적 기여가 증대됐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2022년 3분기부터 건전재정 기조가 유지됨에 따라 물가에 대한 재정 충격의 기여도는 다시 감소했다”며 “재정 건전성 악화는 가계의 기대 인플레이션을 자극할 수 있으므로 재정 상황을 적절히 관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연구진은 재정 건전성이 나쁜 상태에서 정부가 돈을 뿌리면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고 분석했다. 황성현 인천대 경제학 교수는 “재정적자가 나게 되면 (정부의 자금 수요 증가로) 이자율이 올라가게 되는데 이자율이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또 통화량을 늘리게 된다”면서 “통화량 증가가 물가를 자극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 연구팀도 “재정 건전성이 개선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확장재정은 장기적인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다”며 “위기 대응과 경기 부양이 필요할 때는 부채를 줄여 건전재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짚었다.
문제는 이 같은 재정 확대에서 시작된 물가 상승이 근로자들의 소득 감소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물가가 크게 올랐던 2022년만 해도 상반기에는 전국 가계의 실질소득이 증가했지만 3분기(-2.7%)와 4분기(-1.0%)에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박기백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교수는 “물가 대비 임금이 오르지 못하면 총수요가 일으킨 물가 상승 압력 때문에 사람들이 쓸 수 있는 돈은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며 “코로나19 때야 워낙 경기가 가라앉았기 때문에 재정지출을 해도 물가를 자극하지 않았지만 현재는 당시와는 상황이 달라 실질소득 감소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건전한 국가 재정이 물가 안정 측면에서도 중요한 만큼 지속 가능한 성장 전략을 꾀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앞으로는 저출생·고령화에 정부 지출이 급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정부 총지출에서 의무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올해 52.9%에서 2028년 57.3%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국가채무도 같은 기간 1195조 8000억 원에서 1512조 원으로 26.4%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상황이 이런데도 야당을 중심으로 전 국민 25만 원 지원금 같은 선심성 돈 뿌리기식 정책이 난무한다”며 “저소득층과 서민을 도와주겠다는 의도지만 전 국민을 상대로 보이지 않는 세금을 부과하는 꼴”이라고 강조했다.
이강구 한국개발연구원(KDI) 재정·사회정책연구부 연구위원은 선별적인 재정 지원이 필요한 이유가 물가 관리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확장적 재정지출은 물가 수준을 높이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물가 수준을 높이지 않는 선에서 저소득층 혹은 정책이 필요한 계층을 타깃으로 해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를 고려하면 정치권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비율을 -3% 이내로 관리하는 재정준칙 법제화와 지출 구조조정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지출 증가분만큼 수입을 늘리거나 다른 지출을 줄이는 페이고(pay-go) 원칙 도입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최병호 부산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재 (법정) 의무지출이 전체의 53%까지 올라와 있다”며 “비중이 높은 의무지출을 개혁해야 재정 건정성을 높일 수 있는데 법이 개정돼야 하다 보니 정치권의 역할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