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손보험 있으시죠?”
이달 초 강남 한복판에 있는 피부과에서 말로만 듣던 도수 치료를 체험하고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심부열을 발생시키는 치료 기기와 물리치료사의 수기 치료로 구성된 50분짜리 도수 치료 패키지 5회를 결제하면 총 125만 원 중 120만 원을 실비로 지원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보름 전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1만 원으로 도수 치료를 받아볼 수 있다’는 문구에 현혹돼 광고를 클릭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름과 연락처를 입력하고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다음날 전화가 걸려왔다. 마침 고질적인 목·어깨 통증이 심해졌던 참이라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찾아갔다. 30분 남짓 되는 프로그램을 체험한 후 상담이 시작됐다. 매달 보험금을 내고 있지만 보험금을 청구한 적은 없고 보유한 실손보험이 몇 세대인지 모르겠다고 하니 상담 실장은 능숙하게 스마트폰에 깔린 앱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러더니 “2세대라 1만 원만 내면 되는데 왜 이제서야 왔느냐”며 반색했다. 도수 치료가 연간 30회를 넘으면 보험사에서 현장 심사를 나오는데 갱신 시점이 얼마 남지 않아 그럴 걱정이 없으니 당장 치료를 시작하라고도 했다.
‘제2의 건강보험’이라 불리는 실손보험은 지난해 1조 9738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보험 가입자는 전년과 큰 변화가 없지만 보험금 지급액이 1조 2000억 원이나 늘어나면서 적자 폭이 커졌다. 도수 치료, 체외 충격파 등 물리치료로 지급한 실손보험금은 지난해 말 기준 2조 1291억 원에 달했다. 전체 실손보험금의 약 18%를 차지하는 규모다. 보험사 입장에서는 상품을 팔면 팔수록 손해가 나는 구조다. 그 결과 보험료는 매년 오르고 보장 영역은 줄어들고 있다. 애써 유혹을 뿌리치고 병원을 나서려니 뒷맛이 씁쓸했다.
실손보험은 의료 이용을 부추겨 의료비 부담을 키울 뿐 아니라 필수의료를 망가뜨리는 주범이다. 실손보험은 급여 중 법정 본인 부담금과 비급여 항목을 상품 보상 한도 내에서 지급한다. 문제는 보상 대상이 이른바 ‘피안성정재영(피부과·안과·성형외과·정형외과·재활의학과·영상의학과)’에 집중돼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비급여 진료로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는 진료과 개원의와 그렇지 않은 필수의료 의사 간 소득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어찌 의료 대란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의료계는 의대 정원을 늘린다고 해서 소아청소년과 등 필수의료 분야로 유입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비급여 진료로 쉽게 돈을 벌 수 있는데 고강도에다 보상도 적은 필수의료를 누가 하려고 하겠느냐는 얘기다. 공교롭게도 25일부터는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가 시작됐다. 병원에서 일일이 서류를 떼는 번거로움이 사라지면 보험금 청구 규모가 대폭 커질 것은 뻔하다. 정부가 진정 지역·필수의료를 살리기 원한다면 실손보험 제도를 뜯어고쳐야 한다. 실손보험을 이대로 둔 채 의료 개혁은 불가능하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