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가 있기 때문이죠.”
저축은행 관계자들과 금융 당국의 건전성 관리 압박에 대해 얘기할 때면 빠짐없이 나오는 ‘단골 멘트’다. 이들이 말하는 원죄는 2011년 발생한 일명 ‘저축은행 사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로 31개 저축은행이 연쇄 도산하면서 수만 명에 이르는 피해자를 낳은 사건이다.
그런데 “원죄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다시 곱씹어 보면 “원죄만 없었다면 저축은행이 이토록 핍박(?)받는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금융 당국이 가혹하게 채찍질을 하는 것은 단순히 원죄 때문에 미운털이 박혀서만은 아니다. 정확히는 원죄가 있음에도 마치 데자뷔처럼 같은 위기가 현실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축은행 사태 당시만큼은 아니지만 건전성 관리 지표에 켜진 경고등이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올 3분기 ‘깜짝 흑자’를 기록했지만 그 사이 전체 79개 저축은행 중 연체율이 10%가 넘는 곳이 36곳으로 1년 만에 22곳이나 늘었다. 고정이하여신(부실채권) 비율은 계속해서 두 자릿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금융 당국은 저축은행 사태 이후 13년 만에 경영실태평가를 실시했고 이달 중 적기시정조치도 준비하고 있다. 스스로 말하는 원죄로 타 업권 대비 까다로운 규제를 적용 받아왔음에도 상황이 이렇다.
저축은행 업권이 같은 실수를 반복한 것은 10여 년의 시간 동안 새로운 성장 동력은 찾지 않고 손쉬운 선택만 했기 때문이라는 시선이 많다. 저축은행 입장에서는 규제 때문에 영업 환경이 녹록지 않았다고 할 수 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규제 덕분에 이 정도 충격에서 그친 것일 수도 있다.
이번 위기를 잘 넘기더라도 앞으로가 문제다. 새로운 활로에 대해 물어도 뾰족한 답이 없다는 게 저축은행 업계 분위기다. 일각에서는 인수합병(M&A) 규제를 더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수도권·비수도권 저축은행 간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는 만큼 고려해볼 만한 조치다. 외형보다 중요한 것은 본연의 역할과 기능이다. 이 부분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는 ‘원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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