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4일 새벽 비상계엄 선포를 해제한다고 밝혔다. 전날 오후 10시 25분 ‘반국가 세력 척결’을 이유로 윤 대통령이 깜짝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 6시간, 국회가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통과시킨 지 3시간 반 만이다.
윤 대통령은 최근 야당의 감사원장 탄핵, 예산안 독주를 ‘내란 획책’ ‘명백한 반국가 행위’로 규정하는 한편 정부 예산안에 대해 야당이 4조 1000억 원을 삭감한 예산안을 들이밀자 ‘선을 넘었다'고 규정하고 마지막 남은 한방인 ‘비상계엄’을 꺼내 들었다. 야당의 일방통행식 국회 운영에 대해 강력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다.
하지만 국회에서는 비상계엄 해제를 즉각 의결했고 윤 대통령도 이를 받아들였다. 국회 과반을 야당이 차지한 상황에서 불보듯 결과가 뻔했던 비상 계엄을 국가비상사태 없이 선포하며 대혼란을 야기하면서 정국 난맥을 정면 돌파하려던 윤 대통령이 되려 역풍을 강하게 맞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비상계엄 선언 6시간 만에 해제…대혼란만 야기=윤 대통령은 이날 오전 4시 25분께 용산 대통령실에서 생중계를 통해 “계엄 사무에 투입된 군을 철수시켰다”며 비상계엄 해제를 알렸다.
윤 대통령은 “어제밤 11시를 기해 국가의 본질적 기능을 마비 시키고 자유민주주의 헌정 질서를 붕괴시키려는 반국가세력에 맞서 결연한 구국의 의지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며 “그러나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가 있어 계엄 사무에 투입된 군을 철수시켰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바로 국무회의 통해 국회의 요구를 수용하여 계엄을 해제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윤 대통령은 “즉시 국무회의를 소집했지만, 새벽인 관계로 아직 의결 정족수가 충족되지 못해서 오는 대로 바로 계엄을 해제하겠다”고 덧붙였다.
앞서 윤 대통령은 3일 오후 10시 25분께 비상 계엄을 선포했다. 윤 대통령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국민 여러분께 말씀드린다. 지금까지 패악질을 일삼은 망국의 원흉, 반국가 세력을 반드시 척결하겠다”며 “체제 전복을 누리는 반국가 세력의 준동으로부터 국민의 자유와 안전, 그리고 국가 지속 가능성을 보장하며 미래 세대에게 제대로 된 나라를 물려주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국회는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 됐고 입법 독재를 통해 국가의 사법·행정 시스템을 마비 시키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전복을 주도하고 있다”며 “자유민주주의의 기반이 되어야 할 국회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붕괴 시키는 괴물이 된 것”이라고 했다. 이어 “가능한 한 빠른 시간 내에 반국가 세력을 척결하고 국가를 정상화 시키겠다”고 말했다. 이날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언 이후에는 잠시 포털 사이트가 마비되는 등 대 혼란이 벌어졌다.
◇국회 계엄 선언 2시간 여 만에 해제 결의…무장 군인 국회 진입도=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언 직후 국회는 곧바로 비상계엄 해제에 나섰다. 회의장에는 여야를 아울러 190명의 의원이 급박하게 모였고, 전원 찬성했다. 본회의는 4일 새벽 00시 48분에 열렸고, 1시 정각에 안건을 상정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국회의 의결에 따라 대통령은 즉시 비상 계엄을 해제해야 한다”며 “국회는 국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회 경내에 들어와 있는 군경은 당장 국회 바깥으로 나가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에 국회 본회의에 참석한 의원들은 박수를 쳤다.
여야 대표 역시 강하게 비상계엄 상황을 비판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4일 “국회의 계엄 해제요구 결의안 의결로 계엄 선포는 실질적 효과를 상실했다”고 밝혔다. 또 한 대표는 이날 새벽 국회 본회의 직후 본청 앞에서 “지금 이 계엄령에 근거해 군과 경찰이 공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위법한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헌법과 계엄법이 정한 비상계엄 선포의 실질적 요건을 전혀 갖추지 않은 불법 위헌”이라며 ”국무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아 절차법적으로도 명백한 불법 계엄선포”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또 “절차적으로나 실체적으로 위헌·불법이기 때문에 원천 무효이지만 이번 국회 의결로 위헌 무효임이 한번 더 확인된 것”이라며 “계엄 선포에 기반한 대통령의 모든 명령은 위헌 무효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앞서 윤 대통령의 비상 계엄 직후 국회에는 무장을 하고 소총을 두른 계엄군이 국회에 무력으로 진입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비상계엄 선포 직후 국회는 출입문이 폐쇄됐고, 신원이 확인된 일부 인원만 출입이 허용됐다.실제로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 1시간 후인 오후 11시 30분께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에는 국회 경비대와 영등포경찰서 직원들이 담장을 따라 배치됐다. 오후 11시 40분 넘어서는 군으로 추정되는 헬기 3대가 상공을 지나 국회로 진입했고, 곧이어 총기를 든 군인들이 국회 본청에 진입을 시도했다.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가결하기 위한 회의가 열리는 국회 본회의장 출입문 앞은 계엄군과 그 진입을 막으려는 보좌진이 대치하기도 했다. 계엄군을 최류탄을 터뜨리는 한편 창틀을 깨고 진입하는 등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이날 국방부는 3일 저녁 국방부장관 주재로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를 개최하고 전군 비상경계 및 대비태세 강화 지시 비상소집을 실시했다. 이와 함께 전군 경계태세 2급을 발령했다. 계엄사령관에는 박안수 육군 대장이 임명됐다. 이날 조지호 경찰청장도 비상계엄 선포와 관련해 4일 0시 긴급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조 청장은 전국 지방 시도청장에게 정위치 근무를 하라고 지시했다.
금융 시장도 큰 영향을 받았다. 계엄령을 선포한 3일(현지시간) 원·달러 환율은 장중인 0시 16분경 1444.75까지 뛰는 등 극심한 변동성을 나타냈다. 4일(한국시간) 새벽 2시 서울외국환중개에 따르면 원·달러 환율은 전장 대비 1.66% 오른 1425원에 거래를 마감했다. 미국 나스닥에 상장된 한국 기업 및 한국 관련 ETF(상장지수펀드) 주가도 급락했다. 쿠팡은 장중 한때 5% 넘게 하락했다.
◇국정 난맥 정면 돌파 노렸지만 책임론 역풍 불듯=윤 대통령이 깜짝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 6시간 만, 국회가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통과시킨 지 3시간 반 만에 “국회의 뜻에 따라” 비상계엄을 해제했다지만, 향후 후폭풍은 거셀 전망이다.
야당의 입법 독주 탄핵 중독, 예산 삭감 등 무소불위의 행위에 극단의 조치인 비상계엄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비상 계엄 선포가 요건을 충족했는지를 두고 비판에 직면하게 됐다.
계엄은 국가비상사태에서 행정권과 사법권을 계엄사령관이 행사하도록 하는 제도다. 대한민국 헌법 제77조는 대통령이 전시·사변 혹은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 공공의 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 계엄을 선포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지금까지 총 16번의 계엄령이 선포됐으나 이는 시민들의 저항을 진압하고 독재를 이어가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돼 왔다.
특히 우리 헌법이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한해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시민들의 기본권을 제한할 만큼 시급성이 없는 상황에서 느닷없이 비상계엄이 선포된 것이다. 김용현 국방부 장관 등 정부 관계자들은 그동안 “계엄은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스스로 그 입장을 뒤집으면서 신뢰에 문제가 생기게 됐다.
정부의 입장대로 국회를 야당이 과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계엄 선언 →국회 해제 결의’는 불보듯 뻔한 결과였단 점에서 일종의 보여주기식 계엄이었다는 비판도 피할 수 없게 됐다.
야당이 국회에서 위헌적 특검법을 반복해서 발의하는 한편 일방 통행식 의정질서 파괴가 이 사태의 근본적 원인이라지만, 이번 계엄 사태 역시 일방통행식으로 결정됐다는 점에서 명분도 실리도 잃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참모진 중에서도 일부에게만 공유되며 극비리에 추진됐다. 현직 대통령실 참모진 중 상당수는 윤 대통령의 브리핑 발표 직전까지 내용을 전달받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 참모는 저녁 식사 중 긴급 호출을 받고 복귀했으나 계엄 선포는 물론 긴급 담화가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이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출입기자단에도 사전에 내용이 일절 공유되지 않았고 브리핑이 생중계되는 순간에도 정식으로 공지되지 않았다.
국민적 공감대 없는 갑작스러운 계엄 선언에 시민들이 대혼란을 겪은 점 역시 큰 비판을 받게 될 부분이다. 이번 계엄을 건의한 김 장관과 대통령실 참모진, 내각에 대한 책임론은 물론 대대적 개각 목소리 뿐 아니라 윤 대통령 거취에 대해서 비판의 목소리도 커질 것이란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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