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해제’ 후폭풍으로 정부의 정책 점검과 외부 행사 참석이 줄줄이 취소됐다. 기획재정부를 포함한 주요 부처는 당초 일정을 취소한 채 긴급 간부회의를 열고 대책 마련에 역량을 집중했다. 각 행정 부처의 수장이 참석하는 국제 행사도 차질을 빚으면서 관가가 큰 혼란에 빠졌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4일 오전 8시께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열 계획이었으나 오전 1시께 전격 취소했다. 당초 안건으로 올랐던 소상공인·자영업자 지원 방안과 경제 규제 혁신 방안 등은 뒤늦게 하루 뒤인 5일로 조정됐지만 정책 발표를 기다리던 이들은 언제 대책이 나올지 몰라 애를 태워야 했다. 연간 통계 정책을 정하는 국가통계위원회뿐 아니라 한국을 방문한 글로벌 신용평가사 피치와 최 경제부총리와의 만남도 무산됐다. 국가통계위원회는 2019년 홍남기 전 부총리 이후 5년 만에 최 부총리가 참석하는 대면 회의로 열릴 예정이었지만 전격 취소됐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경기 이천의 폭설 피해 현장을 방문한 뒤 안산 선감학원 사건과 관련한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었으나 급하게 취소했다. 김완섭 환경부 장관 역시 지방 일정을 미루고 서울 집무실에서 대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도 이날 인천국제공항을 방문해 면세점 신선 농산물 입점 기념행사에 참석하려 했으나 급히 일정을 조정했다. 해양수산부 역시 수산 식품 수출 업계 간담회와 수산물 홍보대사 위촉식 같은 현장 방문 일정을 모두 잠정 연기한 상태다. 두 행사는 모두 강도형 해수부 장관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정부 관계자는 “국·과장급 공무원들도 오래전 잡혀 있던 출장 등을 가지 않고 대기하는 분위기”라며 “내년도 정책을 준비하는 등 한참 바빠야 할 시기에 업무가 멈춘 상황”이라고 전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경쟁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향했던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은 회의에 참석도 못 한 채 급히 귀국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기일 보건복지부 1차관도 당초 공지됐던 자립 준비 청년 장학금 지원 사업 업무 협약식을 미뤘다. 복지부 관계자는 “사전에 잡아뒀던 장차관의 인터뷰 및 현장 일정을 모두 다시 조율하는 중”이라며 “아직 정국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모르니 당분간은 비상 대기 체제”라고 말했다.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도 이날 한국토지주택공사(LH)·서울도시주택공사(SH)·주택도시보증공사(HUG)와 만나 올해 공공주택 공급 실적과 향후 공급 계획을 검토할 예정이었지만 일정을 취소했다. 산업통상자원부·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공동으로 준비한 ‘인천남동산업단지 민간 합동 문화 융합 협의체 발족식’ 일정도 같이 취소됐다.
경제 관계부처 수장들은 금융시장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느라 진땀을 뺐다. 최 부총리는 전날 오후 11시 40분께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김병환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등이 참석하는 긴급 거시경제·금융현안 간담회(F4 회의)를 소집한 직후 기재부 1급 이상 긴급회의를 열었다. 재정·통화 당국 수장들은 비상계엄이 해제된 후에도 한 차례 더 모여 자산시장 정상 운영을 결정했다.
최 부총리는 오후 4시께에는 한국경영자총협회·대한상공회의소 등 6개 경제단체장을 만나 기업의 목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례적인 정치 리스크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사전에 점검하겠다는 취지다. 최 부총리는 “정부는 기업 경영 활동에 차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며 “경영 활동의 어려움이 있다면 최대한 신속히 해결해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행정부의 각종 현안 대응과 정책 과제 이행이 줄줄이 미뤄지면서 내수 부진 등 경제 전반에 미치는 타격도 적지 않을 것으로 우려된다. 한국은행은 앞서 지난달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올해와 내년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2.2%와 1.9%로 하향 조정했다. 내수 부진에 이어 수출 위축 현상이 나타난 데다 내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출범으로 무역 관련 불확실성이 높아졌다는 이유에서다.
정부는 이 같은 성장률 저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신용카드 소득공제 확대안 등 각종 세제 지원과 지역 소비 확대 등 내수 진작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비상계엄 선포·해제 여파로 인해 언제 나올지 가늠이 쉽지 않다. 정부 관계자는 “정책을 발표해도 추진력을 전혀 얻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며 “정국이 이렇게 흘러가면 행정 실무자 입장에서는 일이 손에 잡힐 수 없다”고 우려했다.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연말 예산안 대치가 길어질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런 사태로 업무 불확실성이 커지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며 “정부가 중심을 잡고 최대한 혼란을 줄여야겠지만 앞으로 정책동력이 얼마나 발휘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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