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 업체 마이크로칩이 1억 6200만 달러(약 2300억 원)의 반도체지원법(칩스법) 보조금 수령을 자발적으로 일시 중단했다. 수주 부진으로 애리조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팹을 폐쇄하면서 보조금을 사실상 포기한 셈이다. 미국 정부가 자국 기업에 지급하려던 보조금 지원 계획에 잇따라 차질이 생기면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에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3일(현지 시간) 블룸버그통신은 마이크로칩이 보조금 수령 절차를 일시 중단했다고 보도했다. 자발적으로 반도체법에 따른 보조금을 단념한 첫 사례다. 마이크로칩은 자동차와 가전제품에 주로 쓰이는 구형 반도체가 주력인 업체로, 최근 수주 부진이 심화하며 실적 악화를 겪고 있다. 마이크로칩의 올해 매출은 지난해보다 40%가량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올해 들어 마이크로칩 주가는 27% 넘게 하락했다.
스티브 상히 마이크로칩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열린 UBS콘퍼런스에서 “1년여 전 보조금을 신청했는데 당시에는 모두가 공장 용량이 부족했던 데다 전 세계가 실리콘 팹을 계속 확장할 것이라고 봤다”며 “그러나 현재 우리의 생산 용량은 넘친다”고 밝혔다. 이어 “정부로부터 1500만 달러를 얻기 위해 1억 달러를 쓸 수는 없다”며 보조금 지원의 한계를 언급했다.
마이크로칩은 전날 높은 재고 수준 등을 이유로 애리조나 팹2를 폐쇄하기로 결정했다. 500명가량이 일하던 애리조나 팹은 내년 3분기까지 문을 닫고 이곳에서 생산되던 제품은 오리건과 콜로라도 공장에서 만들어진다.
오리건과 콜로라도의 상황도 좋지 않다. 이미 오리건 공장에서는 두 차례 강제 휴직이 이뤄졌다. 반도체법은 기존 공장 운영과 약정한 투자 집행을 지원 조건으로 삼는다. 마이크로칩은 경영 환경이 어려워져 보조금 자체가 백지화될 우려가 있다 보니 수령을 일시 중지하기로 한 것이다.
마이크로칩이 극단적 결정을 내린 가운데 임기 내 반도체법 보조금 지급 계약을 마무리하려 했던 조 바이든 정부 당국자들은 당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다. 마이크로칩은 반도체법 2호 지원 대상 기업이었다. 미 상무부는 보조금 지급과 관련해 “마이크로칩 측과 소통하고 있으며 장기 계획에 대해서도 생산적인 대화를 계속하고 있다”고만 밝혔다. 앞서 인텔 역시 당초 합의했던 것보다 적은 보조금(78억 6000만 달러)이 최종 확정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각각 64억 달러, 4억 5000만 달러 수준의 보조금을 잠정 합의했지만 최종 확정되지는 못한 상태다. 블룸버그는 “보조금 수령을 중단하고 애리조나 공장을 폐쇄하기로 한 마이크로칩의 결정은 반도체 산업의 순환 특성을 보여준다”며 “업계의 호황과 불황은 수년에 걸친 미래 투자와 보조금을 협상해야 하는 정책 입안자들에게 어려운 과제”라고 짚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