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과학연구원(IBS)이 과학기술 분야 논문의 질적 우수성(퀄리티)을 평가하는 순위에서 쟁쟁한 글로벌 연구기관들을 제치고 최상위권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단순히 연구개발(R&D) 예산을 늘리는 것으로는 미국·중국·유럽연합(EU) 등 과학기술 강대국과 맞서는 데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알짜배기’ 연구 분야에 집중하는 IBS의 ‘한 우물 파기’ 전략이 주목받는다.
18일 과학기술계에 따르면 IBS는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출판한 논문 중 피인용 횟수 상위 1% 논문(HCP)의 비중이 3.08%로 글로벌 주요 과학기술 연구기관 15곳 중 미국 로런스버클리국립연구소(LBNL·3.61%)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독일 막스플랑크연구회(MPG·2.07%),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1.87%),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1.59%)보다 비중이 높았다.
예산 대비 성과로는 1위다. IBS의 지난해 예산은 2740억 원으로 1조~3조 원 안팎인 LBNL·MPG·CERN·RIKEN에 크게 못 미쳤고 6조 원의 프랑스국립과학연구센터(CNRS)에 비해서는 22분의 1에 불과하다. IBS의 HCP 수는 305건으로 가장 적었지만 예산 1억 원당 HCP 수는 0.111개로 가장 많았다. IBS가 글로벌 기관 대비 R&D 예산과 인력 격차로 인해 양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지만 질적 수준으로는 가장 앞서며 경쟁에서 선방하고 있다는 의미다.
IBS는 3대 국제 학술지로 꼽히는 네이처·사이언스·셀(NSC) 논문 비중과 피인용 횟수 상위 25% 학술지(Q1 저널) 비중에서 각각 3위에 올랐고 논문 1편당 피인용 횟수 4위, HCP 중 자주 인용되는 ‘핵심논문’ 비중 7위 등 여러 질적 지표에서 상위권을 기록했다. 실제로 김빛내리 IBS RNA연구단장을 중심으로 지난해와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주제인 RNA 치료제 관련 연구로 다수의 NSC 논문이 발표됐다. 슈퍼컴퓨터 기반 기후 예측과 인류 진화 연구, ‘전자스핀 큐비트’와 ‘네마틱’ 등 양자컴퓨터 상용화를 앞당길 신물질 발견 등도 IBS가 앞서가는 분야다.
IBS는 이 같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요인으로 MPG 등 세계적 기초과학 연구기관에 안착한 선진국식 성과평가 시스템을 꼽았다. 단순 논문·특허 수 같은 정량평가 대신 장기적인 잠재력 평가로 연구자들의 한 우물 파기식 연구를 최대한 보장한 결과라는 것이다. IBS는 연구 착수 후 5년 후 첫 평가, 이후 3년 단위의 비교적 긴 평가 주기를 둬 장기 연구를 지원한다. 연구단 스스로 SWOT(강점·약점·기회·위협)을 분석하는 자기평가를 하면 외국인 석학이 이끄는 평가위원회가 ‘새로운 발견’과 ‘글로벌 리더십’ 등 학계 영향력을 심층 토의로 정성 평가한다.
IBS는 또 내부 인력뿐 아니라 대학 등과 공동 연구하고 심지어 대학 내에 연구실을 둘 수 있는 연구단을 꾸려 대형·고난도 R&D를 주도하고 있다. 분야별 31개 연구단과 중이온가속기연구소·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 등 2개 연구소를 운영 중이며 이를 통해 1조 5000억 원 규모의 중이온가속기(라온) 같은 대형 연구시설도 유치했다. 선진국식 연구 환경 덕에 외국인 연구자 비중도 30%에 달하는 등 글로벌 R&D에서도 우위를 점하고 있다.
과학기술 패권 경쟁 시대에 대응해 질적 경쟁력 중심으로 내실을 다지는 IBS식 R&D 모델이 확산돼야 할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한국은 이미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R&D 예산 비중이 세계 2위로 앞으로 투자를 획기적으로 늘릴 여력이 크지 않아서다. 정부도 관련 사업인 ‘선도형 R&D’와 ‘글로벌 R&D’ 등 예산을 크게 늘리고 정부출연연구기관 혁신 등을 추진하고 있다. 노도영 IBS 원장은 “정부의 전략적 지원과 우수 연구자 확보로 MPG와 RIKEN 등과 어깨를 견줄 수준으로 성장했다”며 “세계적 연구 경쟁력을 공고하게 다져 한국 과학의 위상을 높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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