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중소기업 오너들이 자녀에게 가업을 승계하지 않고 회사를 외부에 매각하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국내 패밀리오피스 산업이 함께 팽창하고 있다. 당장 사업을 이어갈 생각이 크지 않은 2~3세에 회사를 물려주는 것보다 투자회사를 세워 안정적으로 자금을 운용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는 것이다. 높은 상속세율로 세금 부담이 큰 상황에서 패밀리오피스를 활용하면 증여세와 소득세 등에서 절세 효과도 거둘 수 있어 이런 추세는 계속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24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최규옥 오스템임플란트 회장 일가는 지난해 말부터 최근까지 네오브레인·네오솔루션즈·네오영 등 최소 3개 투자법인을 신설하고 이 법인들에 개인 보유 재산들을 대거 이전했다.
최 회장은 지난해 1월 오스템임플란트 경영권 지분을 MBK파트너스·UCK파트너스에 2740억 원을 받고 매각하며 일시에 거금을 확보했다. 그는 이렇게 마련한 현금 등을 활용해 상장사 서진시스템·APS·주성엔지니어링 등 지분을 각각 7~10% 사들였는데 최근에는 이 지분을 패밀리오피스 법인으로 속속 넘긴 것이다. 최 회장은 패밀리오피스를 이끌 대표(CEO)로 투자 전문가인 정두영 전 과학기술인공제회 최고투자책임자(CIO)를 영입하고 자금 관리 전반을 맡겼다.
지난해 일진머티리얼즈(현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020150))를 롯데그룹에 2조 7000억 원을 받고 매각한 일진그룹 2세 허재명 회장도 투자회사 컴퍼니에이치를 설립하고 투자 보폭을 넓히고 있다. 컴퍼니에이치는 올해 7월 NH투자증권과 업무제휴 협약을 맺고 IB 시장에서 상품화된 인수금융,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에 공동 투자하는 방안까지 적극 검토하고 있다.
2021년 말 한샘(009240) 경영권을 약 1조 4500억 원에 IMM프라이빗에쿼티(PE)에 매각한 조창걸 전 회장 역시 패밀리오피스를 만든 대표 인물 가운데 하나다. 그는 매각이 결정된 직후 태재홀딩스를 설립해 학술사업에 전념하면서도 이 회사를 통해 여러 투자에 나서 왔다. 태재홀딩스 측은 지난해 삼성자산운용과 미래에셋자산운용 등에만 1000억 원가량의 자금을 맡기는 등 국내외에서 다양한 금융 상품에 투자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밖에 올 7월 컴포즈커피를 4600억 원에 필리핀 졸리비푸드에 매각한 양재석 대표, 2017년 카버코리아를 유니레버에 매각하고 약 1조 원을 거머쥔 이상록 회장 등이 패밀리오피스를 설립해 각종 투자 활동에 나서는 인물로 알려졌다.
과거 거금을 쥔 자산가들은 ‘꼬마빌딩’이나 고급 아파트 등 부동산을 주로 사들이는 단순 투자 방식에 머물렀다. 하지만 구조화금융 기법이 다양하게 등장하는 시대를 맞아 패밀리오피스를 통해 제대로 투자하겠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일례로 올 상반기 IMM자산운용이 총 3000억 원 규모로 만든 셀트리온(068270) 지분 투자 펀드에는 삼성증권과 거래하는 패밀리오피스·고액자산가들로부터 1000억 원 넘는 자금이 쏟아져 들어와 펀드 판매가 순식간에 마감됐다.
법인을 설립해 자금을 운용하면 소득세·증여세 등을 아끼는 등 절세 효과가 크다는 것도 패밀리오피스 설립 시 고려되는 점이다. 주식·채권·부동산 등 각종 소득을 더해 납부하는 개인종합소득세는 연 소득 10억 원 이상일 경우 최대 45% 세율이 매겨진다. 하지만 법인세는 소득 3000억 원 미만까지 19~21% 세율만 적용 받는다. 기업 승계 과정에서 최대 50%인 증여·상속세를 일단 피하고 패밀리오피스 설립을 통해 자연스러운 부의 이전을 노리는 자산가들도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시중은행 소속의 한 세무사는 “법인을 설립하면 각종 비용들을 매출에서 공제할 수 있어 개인소득세를 낼 때보다 절세할 방법이 상당히 많다”면서 “투자법인 설립시 자녀들을 대주주로 참여시키면 궁극적으로 증여나 상속까지 해결할 수 있어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중견·중소기업 오너들 사이에서 경영권을 외부에 매각한 뒤 패밀리오피스를 설립하는 사례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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