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산업성이 2021년 6월 ‘반도체·디지털 산업 전략’이라는 대책을 발표했다. 경산성은 “지난 30년간 10배 성장한 반도체 시장은 향후 10년 내에 100조 엔 규모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일본은 반도체 산업의 점유율이 크게 하락하고 거의 0에 가까워질 위험에 처해 있다”고 밝혔다. 일본 역내에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지 않는다면 향후 첨단산업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이 깔려 있었다.
덩치만 큰 공룡이던 일본은 이후 달라지기 시작했다. 일본은 TSMC 구마모토 공장 유치, 반도체 파운드리 기업 라피더스 설립을 발표하며 반도체 산업 육성에 나섰다. 이후 경산성은 2023년 274쪽 분량의 ‘반도체·디지털 산업 전략 개정안’을 내놓았다. 라피더스가 2027년까지 2㎚(나노미터·10억분의 1m) 반도체를 양산할 수 있도록 최첨단반도체기술센터(LSTC)의 연구개발(R&D) 능력과 일본의 유력 소재·부품·장비 업체들의 역량을 집중한다는 것이 뼈대다. 특히 막대한 보조금 지급을 통해 일본 역내에 정보기술(IT) 분야 공급망 체계를 완성하겠다는 방침을 명확히 했다.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라피더스에 지급한 보조금은 9200억 엔(약 8조 6000억 원)에 달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본은 최근 2030년까지 반도체와 인공지능(AI) 산업에 10조 엔을 투입한다는 계획까지 내놓았다. 생성형 AI 개발을 위한 슈퍼컴퓨터 정비 비용도 보조한다.
전문가들은 ‘잃어버린 20년’에 빠져 있던 일본 정부가 과감한 산업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고 입을 모은다. 일본마저 재빠르게 움직이는 가운데 한국 정부는 비상계엄 사태와 탄핵 정국에 빠져 있어 아예 손발이 묶여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 통상정책자문위원장인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1일 “일본은 경제 안보의 핵심을 반도체로 파악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육성한다는 목표의식을 갖고 있다”며 “그러나 한국은 산업 정책 측면에서 목표가 명확하지 않다. 현재처럼 정치가 경제를 압도하는 상황에서 관료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경산성을 필두로 한 일본 정부는 첨단산업 육성 측면에서 기민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실제로 경산성의 강력한 요청에 일본 내각도 과감한 반도체 보조금 지원을 추진할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최근에는 경산성 관계자들이 삼성전자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부지를 시찰했던 것으로도 알려졌다.
일본 재계의 움직임도 빠르다. 세계 7·8위 자동차 업체인 혼다와 닛산이 합병 작업에 들어간 것이 대표적이다. 미쓰비시자동차도 조만간 합류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이지평 한국외대 융합일본지역학부 특임교수는 “이번 합병 과정에서는 일본 정부의 별도 개입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면서도 “전기차 전환과 디지털화 측면에서 테슬라와 중국 업체들의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구조 개편에 나섰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중국 추격과 설비 과잉에 시달리면서도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국내 석화 업계와 대비된다.
최근에는 도시바 메모리반도체사업부를 모체로 두는 키옥시아가 일본 도쿄 증시에 상장해 1200억 엔의 자금을 조달했다. US스틸 인수를 추진 중인 일본제철도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일본제철은 미국 백악관에 향후 US스틸 생산능력 축소 시 미국 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했다. US스틸을 인수하기 위해서라면 미국 내 제철소 구조조정을 포기하는 것까지 감수하겠다는 의미다.
한국은 비상계엄 사태와 탄핵 정국으로 첨단산업 육성에 속도도 못 내고 있다. 지난해 11월 정부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3조 원에 가까운 인프라 지원을 약속했는데 국회에서 예산안 심의가 중단되면서 무산됐다. 허 교수는 “자민당 중심의 일본 정치를 두고 고여 있는 물이라고 많이 표현하지만 적어도 국익 측면에서는 정책 조정이 한국에 비해 원활하게 되는 편”이라며 “반면 한국은 경제부총리가 특검 거부권과 헌법재판관 임명과 같은 사안을 고민할 정도로 경제 컨트롤타워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우려했다.
기술 외교 측면에서도 일본을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경영학회 글로컬 신산업혁신생태계 연구팀에 따르면 일본은 미국, 유럽연합(EU), 영국, 네덜란드, 인도를 비롯한 각국과 반도체 산업 관련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경산성과 LSTC를 필두로 미국 국립반도체기술센터(NSTC)나 영국 과학혁신기술부(DSIT) 같은 기관과 반도체 공동 R&D를 추진하는 것이 골자다. 김재구 명지대 경영학과 교수(전 한국경영학회장)는 “일본은 2020년대 들어 글로벌 다자 외교를 통해 주도적으로 공급망 확대와 기술 표준 공조를 강화하고 있다”며 “가뜩이나 한국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재구축되는 단계에서 소외되고 있는 형국이었는데 최근의 정치 상황으로 이 같은 전략 추진에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분석했다.
기업계와 정부, 정치권 사이의 유기적인 연결이 필요하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일본은 게이단렌이나 경제동우회 같은 재계 단체가 정치권과 활발히 교류하며 산업 정책을 구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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