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일 "전례 없이 정치·경제적 불확실성이 커졌고 새해 물가, 성장, 환율, 가계부채 등 정책 변수 간 상충이 확대될 것"이라고 밝히며 올해 통화정책 방향을 예고했다.
이 총재는 이날 신년사에서 "입수되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대내외 리스크(위험) 요인들의 전개 양상과 그에 따른 경제 흐름 변화를 면밀히 점검하며 금리 인하 속도를 유연하게 결정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성장률 제고를 위해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진통제'처럼 써선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총재는 “2%를 밑도는 성장률의 절대 수준만을 과거와 비교하면서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고통을 줄여주는 진통제로만 사용한다면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며 “단기적인 부양과 함께 고통스럽더라도 구조조정 문제에 집중해서 중장기적으로 잠재성장률을 높이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통화당국이 가계부채를 과도하게 인식한다는 비판에 대해선 “올해 경기둔화 우려가 커지면서 가계부채 관리를 좀 미루고 경기 부양에 더 힘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면서도 “지난 18년간 가계부채는 부동산 대출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꾸준히 늘어났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금리를 인하하면) 당장의 경기둔화 고통을 줄이고자 미래에 다가올 위험을 외면해 왔던 과거의 잘못을 반복할 수 있다”며 “경기를 고려하여 비부동산 가계부채 및 비수도권 부동산 대출에 대한 미시적 조정을 검토할 수는 있겠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가계부채 증가율을 명목국내총생산(GDP) 성장률 내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거시건전성 정책 기조는 흔들림 없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또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헌법재판관을 임명한 것을 지지하는 듯한 메시지도 내놨다. 이 총재는 “최 대행이 대외 신인도 하락과 국정공백 상황을 막기 위해 정치보다는 경제를 고려해서 어렵지만 불가피한 결정을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우리 경제 시스템이 정치 프로세스와 독립적으로 정상 작동할 것임을 대내외에 알리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경제에 대한 부풀려진 비관론에 대해선 경계했다. 이 총재는 “하방위험이 커졌지만 현재의 잠재성장률 2%나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 이상인 26개국의 성장률 전망치 평균인 1.8%와 유사한 수준으로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 위기와 같은 상황으로 보는 것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했다.
자영업자 구조조정에 대한 언급도 빠지지 않았다. 이 총재는 “추경을 통해 자영업자나 소상공인을 도와주더라도 이들의 현상 유지를 위한 지원에만 초점을 두어서는 안 될 것”이라며 “채무조정, 전직 교육, 퇴직자의 재취업 기회 제공 등을 통해 자영업자들이 보다 생산적인 부문으로 진출하게 도와주는 구조조정 지원을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한국 경제에 필요한 '창조적 파괴’에 대한 조언도 나왔다.
이 총재는 수출 경쟁력 저하, 기업 가치 제고(밸류업) 노력 부족,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의 가계부채 비율 등의 문제를 거론하며 "언급된 구조적 문제의 해결을 미뤄온 결과,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은 2%까지 낮아졌고 이를 해결하지 않으면 2040년대 후반에는 0%대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올해 우리 앞에 놓인 환경은 결코 녹록지 않지만, 과거에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는 이번에도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며 "손자병법의 '근심을 이로움으로 삼는다'는 이환위리(以患爲利), '좋은 위기를 낭비하지 말라'는 서양 격언처럼, 해야 할 것부터 차분하게 실천하고 새 기회를 만들면 우리 경제는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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