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국가 연구개발(R&D) 사업의 예비타당성조사를 폐지하는 방안이 정부 입법으로 발의됐지만 한 달 가까이 국회 논의 테이블에 오르지 못하면서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비상계엄 사태와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지는 정국 상황에서 관련 논의가 후순위로 밀린 탓도 있지만 ‘윤석열표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야당의 미온적인 태도 탓에 제도 개선 작업이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적어도 4월까지 관련법을 통과시켜 연내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탄핵 심판에 이어 조기 대선까지 치러지는 정치 일정에 떠밀려 유야무야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5일 과학기술계에 따르면 6일 열리는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첫 전체회의에 지난달 정부안으로 발의된 과학기술기본법 개정안이 과학기술원자력법안심사소위원회에 하달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과방위 전체회의 안건 가운데 과학기술소위 관련 법안은 한 건도 상정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됐다. 과방위 야당 관계자는 “정보통신방송법안심사소위 의결 법안과 함께 방송통신위원회 직무대행 사퇴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예산 편성 등의 현안 질의 등이 진행될 예정”이라며 “과학기술기본법은 하달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통상 법안은 상임위 소위에서 법안심사를 한 뒤 전체회의를 거쳐 본회의에 상정된다. 정부는 지난달 10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R&D 예타 폐지 이행을 위한 국가재정법·과학기술기본법 개정을 의결하고 국회에 넘겼다. 문제는 단순히 방송통신 관련 이슈에 밀려 논의가 미뤄진 것이 아니라 윤석열 정부의 과기 정책에 대한 야당의 거부감이 크다는 점이다. 해당 관계자는 “과학기술기본법 개정안은 현 정부가 입맛에 맞는 R&D에 예산을 몰아주겠다는 것”이라며 “신속성과 효율성만 따질 경우 모든 국책 사업의 예타 자체가 필요 없게 된다”고 비판했다.
정부는 예타 폐지를 통해 단순 장비 도입 사업은 빠르게 추진하고 입자가속기·우주발사체 개발처럼 규모가 크거나 관리가 복잡한 고난도 사업은 여러 단계로 나눠 허가하는 등 단계별 심사로 R&D 사업성 평가의 신속성·효율성을 높이겠다는 방침이다. 예타 통과만을 바라보며 R&D 사업을 시작하지도 못하는 현실을 개선하겠다는 취지인 셈이다. 하지만 야당은 지난해 R&D 예산 삭감 이후 현 정부가 강조한 선택과 집중을 통한 혁신R&D가 결국 특정 사업에 대한 과도한 쏠림으로 나타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적지 않은 과방위 소속 야당 의원들이 R&D 예타 폐지 불가 입장이 확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과방위에서 여야 합의가 이뤄진다고 해도 넘어야 할 산은 또 있다. 국가 예산이 포함된 법안이라는 점에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국가재정법도 개정돼야 한다. 국가재정법 의결을 전제로 과학기술기본법 개정이 진행되고 있지만 기재위는 현재 임시국회 일정조차 정하지 못한 상태다. 기재위의 한 관계자는 “불확실한 정치 상황에서도 미래 성장동력 확보와 경제 회복을 위한 정책 논의와 입법 활동은 정상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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