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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에너지 이념화…탈원전 망령에 전력계획 '셧다운 위기'

[巨野의 퇴행]

◆ 11차 전기본 미확정 여파 확산

장기송변전 등 줄줄이 계획 밀려

전력수요 예측 전문가 영역인데

정치개입으로 경쟁력 심대한 타격

원전발전 축소땐 해외수주도 차질

부산 기장군 해안가에서 국내 최초로 원전 해체 작업이 시작된 고리원자력발전소 1호기(오른쪽)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오른쪽부터 고리1, 2, 3호기. 연합뉴스






장기 송변전 설비 계획은 안정적인 전력망 구축을 위해 한국전력이 2년마다 수립하는 15년짜리 장기 계획이다. 15년간 국가에 필요한 송전 및 변전 설비에 관한 세부 계획인 만큼 같은 주기로 발표되는 전력수급기본계획의 전력 수급 전망과 송변전 설비 확충 기준을 뼈대로 삼아 수립된다. 한전은 제11차 전기본이 지난해 말까지 확정되면 2024~2038년 계획을 담은 제11차 장기 송변전 설비 계획을 올해 4~5월 중 발표하려 했지만 11차 전기본 국회 보고가 밀리면서 해당 일정도 밀리게 됐다.

에너지 부문 최상위 계획인 11차 전기본 미확정의 여파가 계속 커지고 있다. 도시가스사업법에 따라 2년 주기로 수립하는 장기 천연가스 수급계획은 올해 제16차 계획 발표를 예정하고 있다. 앞서 정부는 제13~15차 장기 천연가스 수급계획을 4월에 공고해왔지만 11차 전기본 확정이 불투명해지면서 이 일정도 불확실해졌다. 산업통상자원부의 한 관계자는 “준비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공고 일정을 장담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사무국에 제출하기로 한 2035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의 경우 한국은 제출 권고 기간인 2월을 넘길 가능성이 커졌다. 2035 NDC 역시 전기본을 주된 기초 자료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2024~2028년 계획이 담길 제6차 집단에너지 공급 기본계획의 경우 정부는 일단 이달 중 초안이라도 만들 계획이다. 11차 전기본 확정이 밀리면서 당초 지난해 발표하기로 했던 6차 집단에너지 계획도 차일피일 미뤄졌는데 이마저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산업부의 한 관계자는 “집단에너지 계획 역시 전기본과 함께 가는 만큼 계속 지연돼왔다”며 “다만 집단에너지는 이미 허가된 공급 물량이 많아 향후 5년치는 해당 물량을 기초로 전망이 가능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추가로 △제6차 신재생에너지 기술 개발 및 이용·보급 기본계획 △신규 원자력발전소 부지 선정 계획 △제3차 중·저준위 방폐물 관리기본계획 등도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정부 계획을 바탕으로 중장기 사업 전략을 짜는 민간 발전사 역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한 민간 발전사 관계자는 “에너지 계약은 십수년 짜리 장기 계약이 많은데 11차 전기본이 언제 확정될지, 수정이 될지 등 불확실성이 너무 커 규모를 확정짓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조홍종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여당이든 야당이든 에너지 문제에 정치권이 개입하는 것 자체가 큰 문제”라며 “전력 수요 예측이나 에너지 정책은 전문가의 영역이며 지금처럼 정치적으로 결정이 되면 국가 경쟁력에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차세대 먹거리이자 에너지 안보를 위한 원전 산업 경쟁력 강화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더불어민주당에서 11차 전기본에 포함된 신규 원전 4기 건설 계획을 축소·폐기하고 재생에너지 비중을 늘리지 않으면 국회 보고를 받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 입법조사처 역시 2일 보고서를 통해 “재생에너지 비중 확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야당의 주장에 힘을 싣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이에 산업부 고위 관계자는 “절대 수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정부가 고수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늦추는 식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산업계에서는 신규 원전 4기를 건설하고 2038년까지 원전 발전량 비중을 35.6%로 확대한다는 기존 정부안이 수정될 경우 향후 원전 수출·수주도 축소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원전업계의 한 관계자는 “지난달 한국수력원자력 컨소시엄이 루마니아 원자력공사(SNN)의 2조 8000억 원 규모 ‘루마니아 체르나보다 1호기 설비 개선 사업’ 계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은 한국이 원전 계속운전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국내에서 원전 레코드가 쌓이지 않는다면 해외에서의 대형 수주도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원자력협회는 2030년까지 전 세계에서 160여 개의 원전 건설이 계획돼 있고 한국은 이 중 약 70기를 수주할 역량이 있다고 평가했는데 이 가능성이 축소되는 셈이다.

에너지경제연구원장을 역임한 손양훈 인천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전력 수요가 엄청 늘어날 것으로 예상돼 전 세계가 원전 산업 강화로 돌아선 상황에서 우리만 거꾸로 가겠다는 모양새”라며 “재생에너지로는 그 수요를 채울 수가 없기 때문에 원전 정책을 늦추거나 줄일 때가 아니다”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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